1952년 2월 아버지 조지 6세가 사망했을 때, 장녀 릴리벳은 5개월 일정으로 4대륙 순방 중이었다. 전용기가 런던 공항에 도착하자, 그녀는 기내에서 검은 드레스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옷보다 먼저 인편으로 전해진 할머니의 편지. 엘리자베스는 할머니 말처럼 살았다. 적어도 드라마 ‘크라운’을 보면.
1️⃣영국 정부, 넷플릭스에 항의하다
“드라마가 허구임을 고지해달라”(영국 문화부장관)
“이 드라마를 다큐로 보는 시청자는 없을 것이다.”(넷플릭스)
넷플릭스가 영국에서 오리지널로 제작, 2016년 공개한 드라마 시리즈가 ‘더 크라운’이다. 영국인 급소인 ‘영국 왕실’을 찌른 건, 의도였을까. 드라마 시즌이 거듭되면서 영국 보수 시청자들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다이애나비를 과하게 미화하고 왕실을 깎아내렸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여왕 남편 필립공에게 생전 누군가 “드라마 ‘크라운’을 봤느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였다고 전해진다. 왕실의 모든 인물이 ‘과도하게 인간적’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은 일부 고증 문제를 빼고는 만족을 표했다고 한다.
2️⃣필립공, 찰스3세가 이 드라마를 싫어합니다
드라마는 엘리자베스의 결혼 준비장면으로 시작한다. 독일계인 필립공은 그리스와 덴마크 왕자 자리를 포기하고 엘리자베스를 택했다. 하지만 영국왕실은 배경이 한미한 그를 좋아할 수 없었다. 조지 6세는 사위에게 말한다. “자네는 한가지만 하면 돼. 오직 엘리자베스를 사랑하는 것. 단 하나의 임무라네.” 필립은 그러겠다 했지만, 지키지 못할 약속이었다.
조용한 외조’라는 평판 뒤에 숨은 여자 사고, 무례, 열등감, 허위의식, 심지어 나치에 대한 우호적 태도까지 드라마에 깨알처럼 박혀있다. 시즌1에는 젊은 시절, 필립공의 과오가 다이나믹하게 펼쳐진다.
절제를 모르는 동생 마가렛은 불륜, 노출 사고는 물론 ‘여왕’ 권좌에 대한 질투심을 여왕 앞에서도 드러낸다. 윈스턴 처칠 총리는 권력욕의 화신으로 그려지는데, 심지어 엘리자베스 결혼식장에서도 자기를 돋보이게 하려고 잔머리를 쓴다. 무례한 대처 총리와 관록이 붙은 엘리자베스의 힘 겨루기도 볼 만하다.
그러나 필립공 만큼이나 분노할 사람은 찰스3세일 것이다. 드라마 ‘크라운’은 시즌을 거듭하면서 시청률이 올라간다. 시청자가 기억하는 사건을 다루기 때문이다. 역시 가장 강렬한 건, 찰스와 다이애나의 불화, 이혼, 죽음.
“(다이애나를) 사랑한다.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이라고 말할 정도로 배려가 부족했던 찰스. 사랑에 빠지는 것도, 싫증내는 것도 잘하는 찰스는 심지어 ‘열등감’마저 느끼는 존재로 묘사된다. 그것도 부인 다이애나에게.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애쓰면서, 동시에 그 관심이 버겁다는 다이애나의 이중적 태도도 잘 그려진다. 여왕은 아들을 비난하면서도, 며느리를 끌어안지는 않았다.
3️⃣ 거대한 연극의 주인공들, 영국 왕실
‘더 크라운’은 영국 왕실이라는 거대한 ‘연극단’을 이끄는 엘리자베스 단장의 리더십에 관한 드라마로도 읽힌다.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The king reigns, but he doesn’t govern)’는 원칙은 로열 패밀리에게는 ‘힘의 한계’를 증명하는 말. 능구렁이 같은 총리들과 힘 겨루는 법, 충신의 거짓말에 속지 않는 법, 자식의 실패를 받아들이는 법, 그러면서도 실패하지 않은 듯 연기하는 법...’권력 동물의 왕국’에서 위엄을 지키는 법을 드라마 속 여왕은 알려주고 있다.
8일 영국 발모럴 성에서 사망한 엘리자베스 여왕을 소재로 삼은 드라마와 다큐 중 가장 많은 대중의 사랑을 받은 작품이다. 편당 제작비가 150억원에 육박하는데, 의상 로케이션 등 무대미술은 ‘이견없이 최고’라는 평을 듣는다.
‘빌리 엘리어트’ ‘더 리더:책읽어주는 남자’를 만든 스티븐 달드리 감독은 손짓, 눈짓 하나로 ‘인간 본성’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섬세한 연출력을 보여준다. 시즌 4개, 40편이나 되지만 순식간에 넘어간다. 역사 이야기가 부담스럽다면, 다이애나비가 나오는 시즌4에서 시작, 4-1-2-3 순으로 봐도 무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