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9월부터 1년이 채 안 되는 기간 스무 명을 잔인하게 살해한 연쇄살인범 유영철. 당시 여성과 부유층을 마구잡이로 살해해 토막낸 뒤 암매장한 엽기 행각이 드러나 온 국민이 그의 잔혹함에 치를 떨었다. 한국 사회에 ‘사이코패스’란 개념을 처음으로 알린 장본인이었다.
넷플릭스가 그를 다룬 다큐멘터리 ‘레인코트 킬러: 유영철을 추격하다’를 공개한단 소식이 전해졌을 때, 일각에선 ‘범죄자 미화’라며 분노하기도 했다. ‘레인코트 킬러’ ‘희대의 살인마’ 등 수식어를 붙여 살인자에게 서사를 부여하거나 사이코패스 범죄를 특출나고 대담한 행태로 표현할 것이란 우려에서였다.
지금껏 한국 미디어에서 유영철을 다룬 다큐멘터리나 TV 탐사프로그램 대부분이 그랬다. 유영철의 불우했던 어린시절과 과거 혼인관계 등을 조명하며 그의 살인 동기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잔인하고 엽기적인 살인 방법을 묘사하는 데 집중했다. 2008년엔 그를 모티브로 한 영화까지 만들어졌다.
그러나 22일 베일을 벗은 다큐멘터리는 우려와 달리 유영철의 가정환경이나 개인사엔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대신 그의 범죄가 피해자와 가족, 경찰, 우리 사회에 남긴 상흔을 조명한다. 공개 닷새 만에 한국 넷플릭스 순위에서 최고 4위까지 오르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 한국계 캐나다인 존 최와 미국 TV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알려진 롭 식스미스가 싱가포르 제작사인 비치 하우스 픽처스(Beach House Pictures)와 함께 2년에 걸쳐 만들었다.
“왜 유영철 사건이냐”는 질문에 제작진은 “프로파일링 기법의 탄생, 경찰 수사 기법, 사회학, 계급 문제, 그리고 밀레니엄 시초의 한국과 서울 이야기를 그리려 했다”면서 “범죄를 추앙하려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들과 체포를 위해 노력한 관계자들, 사건 뒤에 실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범죄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정당하게 대표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고도 했다.
다큐멘터리는 당시 유영철을 검거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경찰들의 인터뷰를 뼈대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강대원 당시 서울지방경찰청 기동수사대장을 중심으로 박명선 당시 기동수사대 반장, 박기륜 당시 강남경찰서장, 암매장 장소 등 현장 감식을 담당했던 김희숙 현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팀장, 유영철과 직접 면담해 심리를 분석했던 권일용 프로파일러, 유영철의 변호사와 담당 검사, 이외에도 사건을 맡았던 담당 형사의 증언 등이 폭넓게 수집됐다.
경찰들은 신사동에서 벌어진 첫번째 명예교수 부부 살인사건 이후 서울 곳곳에서 벌어진 부유층 살해사건과 이들 간의 연결고리를 찾으려 힘을 모았던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유영철의 뒷모습이 찍힌 CCTV를 공개한 배경, 범행 도구를 찾지 못해 머리를 싸맸던 이야기, 범행 현장에서 느꼈던 알 수 없는 살기 등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뒷얘기들을 전한다.
무엇보다 경찰들이 사건을 마주하며 느꼈던 당혹감과 분노에 포인트를 맞추고 있다. 프로파일링 기법은 전무했고, ‘사이코패스’란 개념조차 생소하던 시절. 이들이 맞닥뜨린 부담감과 무력감 등 다양한 감정들이 화면을 메운다. “범인이 우리 머리 꼭대기에 있었다”는 충격과 허탈함이 1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유영철 사건은 살인 사건을 여러 번 접한 베테랑 경찰들에게도 큰 충격과 상처로 남았다. 권일용 프로파일러는 “범인을 잡지 못하면 누군가 또 죽어야 하고, 그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식사도 못 했다”면서 “다시는 내가 나로 돌아올 수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황폐해졌다”고 했다.
사실 이 다큐멘터리는 경찰 입장에선 부끄럽고 창피한 기록일 수 있다. 수사 기법과 과학 기술이 지금만큼 발달하지 않았음을 감안하더라도 그렇다. 마지막 회차에선 보는 사람마저 아찔해지는 경찰의 다양한 실수담이 줄줄이 펼쳐진다.
경찰에 우연히 잡힌 유영철이 자기 입으로 술술 털어놓았기 때문에 밝힐 수 있었던 연쇄 살인 범행. 그가 자백하지 않았더라면 절도 외에 그를 붙잡아 둘 증거는 없었다. 이 시점 경찰은 결정적인 실수를 한다. 담당 경찰들이 수갑을 푼 유영철을 혼자 두고 방을 나서는 바람에 그가 계단을 거쳐 정문으로 유유히 탈출한 것. 지금의 상식으론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이후의 대처는 더 황당했다. 경찰은 흉악범을 놓쳐 ‘개망신’ 당할 것을 우려해 검사를 찾아 “석방을 승인해 달라”고 종용한다. 한마디로 ‘범인이 도망쳐 창피하니 일단 그냥 풀어준 걸로 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담당 검사도 다큐멘터리에 출연한다. “잘하려고 하는 거랑 부패한 경찰이 하는 건 엄연히 다르기 때문에 서류에 사인했다”고 밝히는 대목에선 헛웃음이 나온다.
11시간 만에 영등포에서 유영철을 다시 붙잡은 건 말 그대로 ‘운’이었다.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여전히 고통받고 있음을 생각하면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며 무용담을 펼치는 경찰의 모습이 의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다큐멘터리엔 여전히 그날의 악몽에 시달리는 유영철 사건의 피해자 가족들도 등장한다.
이외에도 “아들을 대학 갈 때까지 책임져 주겠다”며 유영철을 회유해 전혀 다른 수법의 이문동 살인사건까지 그의 소행으로 몰고 갔던 일이나, 피해자의 어머니를 발로 차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지게 했던 당시 논란들이 다시 등장한다.
지금의 경찰은 그때와 다를까. 다큐멘터리에 등장한 한 현직 경찰은 “형사들의 수사 능력과 과학수사, 경찰 시스템이 총망라돼 사건을 착착 해결해나가고 있다. 세계에 이렇게 사건을 잘 해결해나가는 나라는 없을 것”이라며 “그런데 국민이 그 감사함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일부 경찰의 일탈이 나오면 경찰을 욕한다”고 말한다. 경찰의 자화자찬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 국민들에게 평가받아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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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식 범죄 다큐를 좋아한다면
‘살인자 만들기’ ‘아만다 녹스’ ‘게이브리얼의 죽음’ ‘이블 지니어스’ ‘더 리퍼’ ‘고양이는 건드리지 마라’ 등 넷플릭스에서 서비스하는 해외 범죄 다큐멘터리를 좋아한다면 한 번쯤 볼만하다. 넷플릭스가 한국 범죄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건 처음이다.
3회짜리 다큐멘터리의 구조는 평범한 수준이지만 사건 관계자 수십명을 인터뷰해 철저하게 고증하고 새로운 이야기들을 담으려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피가 낭자한 살인 현장 등 지금껏 언론 등을 통해 공개된 적 없는 현장 사진들과 미공개 자료들이 등장한다.
Skip it!
◇끔찍한 화면과 적나라한 묘사를 꺼린다면
‘청소년 관람불가’ 다큐멘터리답게 지금껏 유영철과 관련해 공개된 사진이나 영상 중 가장 수위가 높다. 피와 살점이 튀어 있는 사진, 피로 푹 젖은 매트리스, 선혈이 낭자한 마룻바닥, 불에 탄 현장사진 등 적나라한 자료들이 범죄의 참혹함을 전하고 있다.
영화나 드라마로 꾸며진 화면이 아니라 실제 모습이라는 사실이 더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범죄 현장을 수없이 본 전문가들에게도 트라우마와 상처로 남아있는 현장이 화면으로 고스란히 전해진다. 시각 자료 외에도 사건 담당자들의 적나라하고 상세한 묘사가 가득해 마음이 약한 사람들에겐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
개요 다큐멘터리 l 2021 l 싱가포르 l 3부작·회당 43~53분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특징 우리 사회가 처음 만난 사이코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