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가장 최근 집계한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83.3년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OECD 국가 평균(81.0년)보다 2.3년 오래 살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최근 난데없이 ‘적정 수명 80세’ 논란이 불거졌다.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측 법률대리인이 연이어 페이스북에 쏟아낸 상식 밖의 언사 때문이다.
그는 올해 101세를 맞은 철학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를 두고 “이래서 오래 사는 것이 위험하다는 말이 생겼다”고 썼다. 문재인 정부를 비판했다는 이유였다. 더 큰 패륜은 그다음인데, “고대 로마의 귀족 남성들은 더 이상 공동체에 보탬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되면 스스로 곡기를 끊어 ‘존엄사’ 했다. 그 나이가 대략 70대 중반이었다”며 “나는 약 80세 정도가 그런 한도선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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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준으로 ‘80세’란 결론을 내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평소 적정한 수명에 관심이 많았다는 그에게 영화 하나를 추천하고 싶다. 100세 생일에 대책 없이 모험을 떠나는 팔팔한 할아버지가 주인공인, 영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다. 가슴 뛰는 인생을 꿈꾸며 양로원을 탈출한 노인의 열정이 어쩌면 ‘적정 수명’에 대한 그의 정의를 바꿀지도 모르겠다.
기자 출신 스웨덴 소설가 요나스 요나손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스웨덴에서 120만부, 전 세계에선 800만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다. 소설은 폭탄 제조 재능을 타고난 시골 소년 알란 카손이 본의 아니게 20세기 현대사의 주요 현장을 빠짐없이 누비며 역사의 흐름을 쥐락펴락하게 된다는 기발한 상상력에서 출발한다.
그가 지나온 파란만장한 100년과 100세 이후의 여정을 교차로 펼치는 이 소설은 유쾌하지만 마냥 가볍진 않다. 스페인 내전, 제2차 세계대전, 미국과 소련의 냉전,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 등 세계사의 굵직한 순간들을 기발하게 풍자한다. 그에 비해 영화는 오락적이고 유쾌하다. 역사 비중은 줄이고, 알란 카슨의 경쾌한 여정을 늘렸다.
100세 알란은 다른 노인들이 못 먹는 딱딱한 아몬드 케이크를 씹어 먹고, 슬리퍼 하나 달랑 신고 담을 훌쩍 넘어버린 노인이다. 여전히 폭발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뛴다. 몸은 잘 안 따라줘도, 재밌게 살고 싶어 양로원을 탈출한다. 버스 터미널에서 우연히 5000만 크로나가 든 갱단의 돈 가방을 손에 넣는다. 폭력배에 쫓기면서 우연히 만난 친구들과 새로운 인생을 꾸린다.
그는 100년 평생을 어머니의 유언을 충실히 따르며 살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 괜히 고민해봤자 도움 안 돼.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세상은 살아가게 돼 있어.” 이 무심함이 영화를 관통하는 정서다.
원작에선 매 순간 치열하게 노력하고 냉철하게 판단하는 알란이지만, 영화에선 그에 비해 모든 일이 그저 순리대로 흘러간다. 힘을 좀 빼고 단순하게 살아도 좋다는 뜻일까. “쓸데없이 후회하면 명만 줄지”. 그의 유쾌한 대사에 매사 심각했던 관객들도 표정을 풀게 된다.
지나치게 술술 풀리는 그의 인생엔 물론 영화적 허용이 가득하다. 스페인 내전에서 수 년 간 폭탄을 터뜨리다가, 우연히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목숨을 구한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프로젝트에 합류해 핵무기 개발에 지대한 공을 세우고, 트루먼 당시 부통령의 신임을 얻는다. 소련 물리학자를 통해 스탈린과도 대면하는데, 그 앞에서 프랑코를 언급했다가 노동수용소에 끌려간다. 소련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미국 레이건 대통령 사이에서 이중첩자 역할도 한다.
그렇게 파란만장했던 100년 인생에 비하면 양로원 생활은 지나치게 안락하고 평화롭다. 아끼는 고양이를 물어 죽인 여우에게 폭탄을 터뜨려 복수했다가 억지로 양로원에 끌려 들어온 알란. 평온한 죽음을 기다리는 그곳은 알란에게 교도소나 다름없다. 그는 한순간도 인생을 재미없게 흘러가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없다. 잠시도 제자리에 멈춰 있지 않는다.
알란을 쫓는 폭력배들과 실종된 알란을 찾아나선 경찰의 쫓고 쫓기는 이야기가 박진감 있게 펼쳐진다. 그 가운데 영화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노인이라는 점은 상징적이다. 100세 알란을 돌보던 양로원 직원도 노인, 함께 여행을 떠난 율리우스도 75세다. 그를 목격한 주민도, 쫓아다니는 형사도, 그에게 돈을 뜯긴 폭력배 두목도 모두 머리칼 새하얀 노인이다.
영화 속 노인들은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자조하거나, ‘얼마 안 남은 인생 원하는 것 다 하며 살아보자!’는 영화나 소설의 뻔한 공식을 따르지 않는다. 죽음 같은 건 근처에 없다는 듯, 그저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아갈 뿐이다.
그러면서도 100년을 살아온 인생 선배로서 지혜를 전하는 데는 망설임 없다. “적성이 뭔지 모르겠고, 진로가 고민된다”며 풀죽은 청년에게 그는 “배우는 게 남는 거지. 치매 오기 전에 열심히 해”라고 쿨하게 한 마디 던진다. 사랑 앞에서 고민하고 망설일 땐 “자넨 쉬운 걸 어렵게 하는 게 문제”라며 이렇게 말한다. “소중한 순간이 오면 따지지 말고 누릴 것. 우리에게 내일이 있으리란 보장은 없으니까!”.
작가 요나스 요나손은 2019년 내한 인터뷰에서 “나는 살면서 창문 넘어 도망쳐 본 경험이 많다”면서 “신나는 일 없이 회색 빛깔의 삶을 사는 독자들을 창문 밖으로 끌고 간 것이 성공 비결 같다”고 했다. 주인공 알란은 요나손의 속편 소설 ‘핵을 들고 도망친 101세 노인’에서 101세 생일을 맞아 또 다시 모험을 떠난다. 그의 여행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100세도 안 된 나이에 회색 빛깔을 사는 우리에게 “정신 차리고 창문을 뛰어넘으라”고 말하는 듯하다.
개요 영화 l 스웨덴 l 2013년 l 154분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특징 100세에도 반짝반짝 빛날 수 있다
평점 로튼토마토🍅68%, IMDb⭐7.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