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동네의 부자 엄마, 주 양육자인 엄마들의 시기와 암투, 뒷담화, 경쟁적인 육아, 완벽한 가정을 연기하는 것, 과한 교육열, 고소득 상류층을 향한 열망, 아닌 척하는 위선, 화려함으로 감춘 결핍…’ 과거 ‘엄마’의 상징이 헌신과 희생이었다면, 미디어 속 ‘요즘 엄마’ 이미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전형적이다.
2017년 첫 번째 시즌을 방영한 HBO 드라마 ‘빅 리틀 라이즈’는 언뜻 봐선 이런 전형을 충실히 따르는 미니시리즈다. 미국 캘리포니아 북부 몬터레이의 교육열 강한 사립초등학교. 평균 수입 15만 달러의 부유한 동네에 홀로 아들을 키우는 평범한 싱글맘이 이사를 온다. 초등학교 입학 첫날부터 아이들 사이 폭력 사건이 벌어지고, 피해 아동은 싱글맘의 아들을 가해자로 지목한다. 애들 싸움이 어른들 싸움으로 번진다.
니콜 키드먼, 리즈 위더스푼, 로라 던, 셰일린 우들리 등 초호화 캐스팅으로 공개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리안 모리아티의 원작을 각색한 탄탄한 줄거리와 배우들의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 2017년 첫 시즌이 방영되고 에미상·골든 글로브·비평가협회상 등에서 총 23개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15년 만에 드라마로 복귀한 배우 메릴 스트립은 ‘빅 리틀 라이즈’ 시즌 2 출연 제안에 대본을 끝까지 보지도 않고 OK 사인을 보냈다.
※이 글엔 드라마 ‘빅 리틀 라이즈’의 약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드라마는 사건이 벌어진 ‘그날’에서부터 시간을 거꾸로 되짚어본다. 몬터레이 사립학교의 모든 학부모가 모인 기금 모금 파티. 이날 모인 사람 중 누군가가 계단 아래로 떨어져 죽는다. 누가 죽었는지, 누가 죽였는지는 알 수 없다. 드라마는 그 답을 바로 공개하지 않고 학부모들의 입을 통해 천천히 풀어놓는다. 의심의 화살은 결국 치맛바람 센 다섯 엄마에게로 향한다. 사건 현장에 그들이 있었다.
이들 중심엔 목소리 큰 극성 엄마 매들린(리즈 위더스푼)이 있다. 전직 변호사인 셀레스트(니콜 키드먼)와 싱글맘 제인(셰일린 우들리)의 일이라면 발벗고 나선다. 회사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레나타(로라 던), 매들린 전 남편의 새 부인 보니(조 크라비츠)는 매들린과 사사건건 대립한다.
경제적 여유, 자상한 남편, 사랑스러운 아이들 덕에 만족스러운 결혼생활을 이어가는 이들의 삶은 겉에서 보기엔 모두 비슷하게 행복하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들 저마다 이유로 불행하다. 남편의 폭력, 남몰래 저지른 불륜, 성장 과정의 결핍, 강간으로 낳은 아이, 일과 가정 사이를 아슬아슬 줄타기하는 워킹맘···. 화려함 아래 이들의 비밀스런 수치심이 묻혀 있다.
‘전업맘’과 ‘워킹맘’의 대립, 뒷담화와 거짓말, 내 자식만 소중하다고 으르렁대는 모습은 미디어가 즐기는 ‘여자의 적은 여자’의 구도를 어김없이 재생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회차를 거듭할수록 ‘여적여’란 철 지난 편견을 조롱하고 뒤집는다.
◇'연대'로 폭력에 맞서는 법
이 드라마에 완벽한 여성은 없다. 트라우마로 고통받고, 남모를 결점 때문에 속앓이를 한다. 그런데 유독 한 인물만은 모든 게 완벽해 보인다. 화려한 외모의 셀레스트(니콜 키드먼)다. 한때 잘나가는 로펌 변호사로 승승장구하다가, 결혼하고 두 아이를 낳으며 커리어를 중단했다. 멋지고 능력 있는 남편, 쌍둥이를 낳고도 변함없는 부부 사이의 긴장감…. 이들의 결혼생활은 같은 동네 사람들에게도 선망의 대상이다. 그가 남편에게 무자비하게 폭행당하는 걸 알기 전까지는.
폭력은 드라마 여기저기서 발톱을 드러낸다. 작품은 범인을 알 수 없는 교실 내 괴롭힘에서부터 강간 피해자로 낳은 아들을 데리고 낯선 동네로 떠밀려온 싱글맘, 끔찍한 폭력으로 고통받는 셀레스트의 이야기까지 흘러간다. 여성이라면 누구나 느껴보았을 잠재된 폭력에 대한 공포. 그 마음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도울 수 있는 건 같은 여성뿐이다.
극 초반 엉뚱한 곳에서 헤매던 분노와 암투는 시즌 1에서 2로 향하며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간다. 으르렁대던 다섯 엄마는 결정적인 순간 폭력 앞에서 힘을 모은다. 시즌 1이 학대와 폭력에 맞서는 여성들의 연대라면 시즌 2는 그 과정에서 생긴 상처를 봉합하고 치유하는 과정을 그린다. 드라마는 도저히 함께할 수 없을 것 같던 사람들 간의 연대까지 납득 가능한 방식으로 풀어간다. 죽은 사람은 누구이고 누가 왜 죽였나. 이들은 모든 걸 알면서도 경찰에 거짓을 말한다. 합의된 거짓말이 곧 우정이고 연대다. 드라마의 제목 ‘빅 리틀 라이즈(Big Little Lies)’가 여기서 나왔다.
◇폭력이 또다른 폭력을 낳다
드라마는 셀레스트와 상담사의 긴 대화를 통해 가정폭력 피해자의 비참한 심리를 묘사한다. 셀레스트는 본인이 피해자란 걸 인정할 만큼 약해질 수 없다. 어렵게 낳은 두 아들을 지켜야 해서다. 친한 친구들에게도 폭력을 숨긴다. 남들의 시선이 그의 자존감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가정폭력의 피해자로 규정하는 상담사에게 불쾌감과 수치심을 감추지 못한다. 남편의 폭력에 맞서 싸운 후엔 “나도 남편을 함께 때렸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셀레스트가 남편에게 구타당하는 직접적인 장면보다 상담사와 마주하는 장면을 볼 때 더 고통스럽다. 강렬한 눈빛과 꼿꼿한 자세로도 처절함을 감출 수 없다. 니콜 키드먼은 이 연기로 에미상과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니콜키드먼은 지난해 영국 가디언지에 기고한 칼럼에서 코로나 격리로 늘어나는 가정폭력을 우려하며 “학대 여성들이 실제로 직면하는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드라마를 촬영하는 동안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된 채 연약하고 치욕스럽다고 느꼈다. 촬영장에선 태연한 척했지만 집에 가선 얼마나 영향을 받았는지 깨닫곤 했다”고 썼다.
드라마는 폭력이 한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 초점을 맞춘다. 무조건 남성을 가해자, 여성을 피해자로 단정 짓는 것도 아니다. 두 번째 시즌의 주된 가해자는 셀리스트의 시어머니 메리 루이즈(메릴 스트립)다. “어떤 남자는 강간범일 수도 있지만, 내 아들은 절대 그럴 리 없다. 여자가 유혹했을 것”이라 주장하며 피해자들을 괴롭힌다. 드라마는 아동학대와 폭력가정 아이들의 트라우마도 다룬다. 아이들이 겪는 상처와 폭력의 대물림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한다.
니콜키드먼과 리즈위더스푼은 이 드라마의 총괄 프로듀서로 함께 이름을 올렸다. 두 사람이 각각 운영하는 제작사 두 곳이 힘을 합쳐 만들었다. 여성 중심의 영화·TV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종합 미디어 회사 ‘헬로 선샤인’을 운영하는 리즈 위더스푼은 “우리 두 사람이 비슷한 시기에 원작 소설을 읽었고, 똑같이 그 작품을 제작하고 싶어했다. 서로 경쟁하는 대신 파트너로 함께 작품을 만들기로 했다”고 밝혔다. 흔치 않은 다섯 명의 여성 주연 드라마는 이렇게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기사보기] 위더스푼의 여성 중심 미디어 회사… 타임 선정 ‘영향력 있는 100대 기업’
개요 드라마 l 미국 l 2017~2019 l 시즌 1·2 l 각각 7회
등급 15세 관람가
특징 폭력에 연대로 맞서다
평점 로튼토마토🍅93% IMDb⭐8.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