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잠잠해지면 만나자”던 단톡방은 코로나보다 먼저 잠잠해졌다. ‘가급적 대화 자제’. 안내문이 붙은 엘리베이터에선 멀찍이 서서 모두 앞만 본다. 어떤 주말은 하루 한 마디도 않고 보낸다. 명절·생신·어버이날을 영상통화로 때운다. 나이 든 부모나 가족도 웬만하면 안 찾아뵙는 게 진짜 효도랬다. 이런 세상에서 ‘코로나 밀접 접촉자’란 연락까지 받는다면?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다. 격리와 고립, 폐쇄의 공포는 코로나 이전엔 없던 새로운 유형의 공포다.
전 세계 398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우리는 이토록 외로운데 TV 속 세상은 이상하게 평화롭다. 코로나가 대체 뭐냐는 듯 시치미를 뚝 뗀 드라마들은 딴 세상 얘기같아 이질감이 든다. 그런 와중에 지난 1년 반 동안 사람들이 겪은 고립감, 우울감, 지루함, 외로움 등을 주제로 만든 TV쇼가 나왔다. 최근 넷플릭스에 공개된 ‘보 번햄 : 못 나가서 만든 쇼(원제 : Inside)’다.
미국의 코미디언이자 싱어송라이터, 배우, 영화감독인 ‘보 번햄’이 1년 간 집에 틀어박혀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선 인지도가 없지만, 미국에선 무려 17살이던 2008년에 유튜브 유명인사가 돼 데뷔한 코미디언이다.
◇천재를 1년간 방에 가두면
셰익스피어는 흑사병을 피해 집에 틀어박혀 자가격리하는 동안 ‘리어왕’을 썼다. 평범한 사람에게 격리는 재앙이지만, 천재들에겐 기회가 됐다. ‘못 나가서 만든 쇼’는 외출을 포기한 한 예술가가 1년 간 방구석에서 만들어낸, 현 시점 가장 완벽한 ’2020 코로나 밀레니얼 보고서'다.
장르를 정의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스탠드업 코미디’ ‘뮤지컬’ ‘뮤지컬 영화’ ‘모노드라마’ ‘콘서트’를 한데 합친 장르다. 무대는 처음부터 끝까지 보 번햄의 방 한 칸이다. 한 천재가 스스로 기획해 각본을 짜고, 카메라를 설치하고, 연기·작곡·촬영·노래까지 혼자 다 하는 동안 우리는 그저 그의 방안을 들여다본다.
미국과 영국 등 서구권에선 주요 매체 대부분이 리뷰를 쏟아내며 엄청난 화제를 몰고 왔다. 그의 얼굴과 쇼의 명대사들을 담은 티셔츠가 제작돼 온라인에서 불티가 나게 팔릴 정도다. 영국 매체 ‘가디언’과 ‘더 타임즈’는 별 다섯개 만점을 줬고, 영화비평 웹진 인디와이어는 2021년 최고의 TV쇼 중 하나로 꼽았다. 로튼토마토 평점은 98%, IMDb에선 8.8점을 받았다.
스탭 없이 혼자 만들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결과물에 빈틈이 없다. 그는 지난 2018년 영화 ‘에이스 그레이드’로 미국비평가협회상 신인감독상을 받은 영화감독이기도 하다. 공간과 조명을 최대한 활용한 영상미가 놀랍다.
더 놀라운 건 음악이다. 이 쇼에서 혼자 20여곡을 만들어 불렀는데, 음악만으로도 완성도가 상당하다. 앨범 공개 하루 만에 빌보드 코미디 앨범 차트 1위를 차지한 건 물론 빌보드 200 차트에선 7위까지 올랐다.
◇가장 적나라한 2020 온라인 보고서
이 쇼는 고립에 대한 도전이다. 보 번햄은 1년 간 자발적 고립 상태로 콘텐츠를 만들며 그 경험과 감정을 온전히 쇼에 담는다. 물리적으로는 고립됐지만, 온라인으로 모두 연결된 시대를 사는 모순적 현실을 적나라하게 담은 보고서다. 극 초반 짧은 머리와 수염으로 등장한 보 번햄은 쇼가 끝날 때 쯤엔 메시아 같은 형상이 된다.
팬데믹 시대의 외로움과 고립이 극을 이끌어가는 주요 뼈대다. 자본주의와 인터넷, 소셜미디어, 사회에 대한 비판과 통찰로 나머지를 채운다. 이런 시국에 사람들을 웃기는 코미디언으로 사는 일, 백인 남성의 부담스러운 특권, 심각한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겪으며 느낀 감정들까지 유쾌하게 풀어낸다.
인스타그램 속 백인 여성의 스테레오타입을 묘사한 ‘White woman’s instagram’, 그림으로 기록을 남긴 고대 이집트인들처럼 이모티콘으로 모르는 사람과 야한 대화를 나누는 ‘Sexting’ 등 팬데믹 속 밀레니얼의 일상을 그린 감각적인 노래들과 연출이 인상 깊다. 자신이 주인공이 된 게임을 스트리밍 하는 장면은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참신한 패러디다. 그중 압권은 ‘Welcome to the internet’. 유튜브 영상으로 직접 보기를 권한다.
◇코로나 시대의 예술이란 이런 것
코로나 이후 뮤지컬·연극 등 공연 업계는 그야말로 비명을 지르며 근근이 버티고 있다. 아직도 많은 예술가가 관객을 대면하지 못하는 현실을 돌파하지 못하고 좌절하거나 방황하고 있는데, 보 번햄은 천재성으로 모든 벽을 뛰어넘는다. “이 시대의 예술이란 이런 것”이라고 대안을 제시하는 듯하다.
그에게도 어려움이 없었던 건 아니다. 5년 전 무대에서 공황발작을 일으켜 스탠드업 코미디를 접었다. 5년간 정신건강을 회복하는 데 집중하며 영화를 찍고 상도 받았다. 이제 슬슬 코미디를 다시 시작해 보려는데 코로나 바이러스가 터진 것이다.
그는 이 모든 과정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냉소와 진실성이 보 번햄식 코미디의 무기다. 이 쇼에서 그는 자살까지 고민했던 자신의 과거와, 고독감을 감당하기 어려워 무너지는 현재 자신의 모습까지 완벽히 까발린다.
Stream it!
◇지금껏 본 적 없는 특별한 쇼를 보고 싶다면
확실히 한국엔 지금껏 없었던 장르다. 코미디언이자 영화감독이면서 작사와 작곡, 노래까지 혼자 다 해낼 수 있는 능력자는 흔치 않다. 이 영상을 시청하는 것 자체가 새로운 경험이다. 방 한 칸 좁은 공간에서 화면 비율과 전환, 빛과 그림자, 다양한 음악과 음향을 치밀하고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전통적인 스탠드업 코미디 쇼와는 완전히 다른 형식을 띤다. 뮤지컬처럼 중간 인터미션도 등장한다. 그동안 그는 물과 세제를 유리에 뿌려 렌즈를 박박 닦는다. 그런 작은 재치들이 돋보이는 쇼다. 혹시 영상이 지루하다면 그냥 틀어두고 음악만 들어도 좋다.
Skip it!
◇기분 전환용, 큰 웃음을 원한다면
‘코미디’란 장르에 걸맞은 유쾌한 웃음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 있다. 빈정대고 비꼬는, 자기 비하적이고 냉소적인 대사들 가운데 소소한 웃음 포인트가 있다. 한 템포 늦게 피식 웃게 되는 유머가 이 쇼의 주류다.
서구권 사람들, 특히 서구권의 젊은 사람들 사이에 통하는 유머코드가 많아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토종 한국인으로서 솔직히 말하자면 이 쇼의 초반부는 살짝 긴가민가하다. 만국 공통의 웃음 코드도 있지만, 40분이 넘었는데도 이 쇼의 매력을 전혀 모르겠다면 억지로 볼 필요는 없겠다.
개요 코미디 l 미국 l 2021 l 87분
등급 15세 관람가
특징 ‘미친 재능’이란 이런 것
평점 로튼토마토🍅97% IMDb⭐8.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