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리멍텅한 눈으로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개구리. 네티즌이라면 이 괴상하게 생긴 개구리 그림을 어디선가 한번쯤 봤을 것이다. 태생은 미국이지만, 몇 년 전부터 한국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자주 출몰해왔다.

이 개구리의 정식 이름은 ‘페페 더 프로그(Pepe the Frog)’, 미국 작가 맷 퓨리(Matt Furie)가 2005년 내놓은 만화 ‘보이스클럽(Boy’s Club)’의 주인공이다. 만화에서 페페는 대마초를 피우고, ‘나는 레즈비언’이라고 쓴 티셔츠를 입고 다니며, 바지를 완전히 벗고 엉덩이를 드러낸 채 오줌을 갈긴다. 엉뚱하고 이상하지만, 극악무도한 패륜아 캐릭터는 아니다.

그랬던 페페가 변했다. 이 개구리의 정체성이 변하기 시작한 건 2008년쯤부터다. 미국 온라인 커뮤니티 ‘4chan’에서 이모티콘처럼 사용되며 유명한 ‘밈(meme)’으로 떠오른 게 결정적 계기였다. 밈이란 그리스어로 ‘모방’을 뜻하는 미메시스(mimesis)와 유전자(gene)를 합친 말. 영국의 진화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저서 ‘이기적 유전자’에서 처음 등장한 개념으로, 모방·복제·재창조를 거쳐 후대에 전파되는 문화 요소를 뜻한다.

왓챠 '밈 전쟁: 개구리 페페 구하기'

온라인 커뮤니티 4chan은 변변한 직업이 없고, 연애를 하지 않으며, 성인이 되어도 부모님 집에 얹혀 사는 서구권 ‘잉여 인간’들의 집결지 같은 곳. 우리나라로 치면 디시인사이드의 일부 갤러리와 비슷한 공간이다. 4chan 유저들은 10여 년 간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온라인 게시판에 모여 페페를 따라 그리며 놀았다. 모두가 낙천적이고, 행복하고, 건강한 모습을 경쟁적으로 올려대는 인터넷 세상에서 하찮은 개구리 페페의 B급 정서는 소외된 사람들의 마음을 관통했다. 온라인에서 관심을 끌어보려는 잉여들의 ‘진화론적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페페는 질긴 생명력을 얻었다. 그리고 점점 더 독한 모습으로 변해갔다.

지난 10년 간 인터넷에서 가장 성공한 밈으로 손 꼽히는 페페, 이 개구리를 띄운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개구리는 어떻게 재가공되고, 재정의되며, 재창조됐을까. 페페 열풍을 분석한 다큐멘터리가 최근 왓챠에 풀렸다. ‘밈 전쟁: 개구리 페페 구하기(2020)’는 10여 년 간 페페를 둘러싸고 벌어진 천태만상을 파헤친 작품이다.

원조 '페페 더 프로그' 캐릭터.

다큐는 창작자의 손을 떠나버린 페페가 ‘혐오 상징’에서 ‘트럼프 분신’을 거쳐 ‘홍콩 민주 투사’로 변신해 온 과정을 세밀하게 추적한다. 평소 온라인 커뮤니티 문화와 사회 현상에 관심이 많은 사람, 내년 3월 대선을 앞두고 펼쳐질 SNS 전쟁이 궁금한 사람에게 이 다큐를 추천한다.

◇총기 난사범에서 트럼프까지…페페의 무한 변신

2015년 10월 미국 오리건주 움프콰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벌어졌다. 13명이 죽고 7명이 다친 이 사건의 범인은 26세 외톨이 남성이었다. 범인은 사건 하루 전 4chan에 권총을 든 페페 그림과 함께 “만약 북서부에 산다면 내일 학교에 가지 말라”는 예고 글을 올린 것으로 나타났다. 페페는 졸지에 전 세계 뉴스를 타게 됐고, 불명예스러운 ‘테러리스트’ 딱지를 얻었다. 결국 온라인 공간에서 KKK단원, 반(反)유대주의자, 탈레반 버전으로 잇따라 변신했다.

4chan에 올라온 2015년 총기 테러 예고글

얼마 뒤 페페는 도널드 트럼프가 됐다. 4chan의 정치 게시판에서 트럼프를 지지하는 대안 우파 세력이 페페와 트럼프를 합성한 그림을 쏟아낸 것이다. 트럼프는 ‘악재’가 될 수 있는 이 현상을 놓치지 않았다. 힐러리 클린턴이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페페가 ‘네오 나치’의 상징이라고 비판했을 때, 트럼프는 역으로 자신과 페페를 합성한 그림을 소셜미디어에 올리며 화답했다.

트럼프 캠프 관계자는 “대선 운동 기간 4챈에서는 자발적으로 밈을 생산해 주변을 트럼프 지지자로 유도하려는 ‘밈 대전’이 펼쳐졌다”며 “이를 통해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던 이들이 정치에 발을 들이게 됐다”고 했다. 아무런 영향력도, 돈도, 연줄도 없던 사람들이 소셜미디어 공간에서 가장 효과적인 정치 밈을 생산했다는 것이다.

왓챠 '밈 전쟁: 개구리 페페 구하기'

급기야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Time) 지도 2016년 가장 영향력 있는 가상 캐릭터로 페페를 선정했다. 작가 맷 퓨리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휩싸였다. 그는 “미디어와 정치에 휘말리는 건 극도로 싫었는데,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렇게 돼버리고 말았다”며 “한때 그저 여유로운 개구리일 뿐이었던 페페가 인종차별주의자나 반유대주의자 사이에서 혐오 상징으로 사용되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분노했다.

페페는 테러리스트→트럼프→홍콩 민주 열사로 변모해왔다.

작가는 애초에 트럼프 지지자도 아니었다. 저항도 해봤다. 페페가 트럼프에게 오줌을 갈기는 그림을 그리고, ‘#SavePepe’ 해시태그를 달면서 ‘페페 살리기 운동’을 펼쳤다. 2017년에는 페페의 장례식을 다룬 만화를 배포하며 공식적으로 사망 선고를 내렸다. 하지만 그럴수록 페페의 인기는 더욱 치솟았다.

◇한국에선 ‘일베충’ 취급, 홍콩에선 민주화 상징

불멸의 페페는 2015~2016년쯤 한국에도 본격적으로 확산했다. 처음에는 특정 커뮤니티 성향에 관계 없이 찌질이 이미지로 널리 소비됐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페페는 극우 성향 커뮤니티 일베(일간베스트)의 상징”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일본 욱일기와 합성한 페페도 등장했다.

2019년 홍콩에선 페페가 전혀 다른 이미지로 생명력을 얻었다. 테러범·극단주의자·찌질이 이미지를 벗고 민주주의와 저항, 희망의 상징으로 떠오른 것이다. 서구 언론이 앞다퉈 홍콩 시위대에 이유를 물었지만, 답은 단순했다. “못생겼으니까요.” “그냥 귀여워서 좋아해요.” “슬퍼하는 얼굴이 다양해서 좋아요.”

2019년 12월 홍콩 시민들이 개구리 페페를 들고 민주화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 연합뉴스

홍콩의 페페는 노란 헬멧을 쓰고 경찰의 폭력 진압에 분노했다. 부조리를 고발하는 기자로도 변신했다. 시민들은 페페 깃발과 팻말, 인형을 들고 시위에 참석했다. 경찰의 무력 진압에 여성 시민이 실명 위기에 빠졌을 때는 오른쪽 눈에 피 묻은 안대를 한 페페가 등장하기도 했다.

과학적으로 이상하다고 여겨지는 온라인 행동을 연구하는 컴퓨터 공학자들이 페페 관련 빅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페페는 4chan·트위터·레딧·갭 등 4개 채널에서만 연간 1억6000만개의 밈으로 재생산된 것으로 나타났다. ‘페페 캐시’라는 가상 화폐도 등장했다.

작가는 페페를 더 이상 본인 마음대로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틈틈이 극단주의자들을 대상으로 저작권 침해 소송을 걸고 있다. 그는 슬픈 개구리 페페처럼 모든 것을 체념한 표정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작가는 지난 10여 년 소동을 통해 ‘모든 것은 변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최근에는 불교 사상에 영향을 받은 듯한 그림들을 주로 그리고 있다. 매일 같이 네티즌 손에 죽고, 태어나기를 반복하는 페페, 이 개구리는 과연 윤회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을까.

왓챠 '밈 전쟁: 개구리 페페 구하기'

개요 다큐멘터리 l 미국 l 2020 l 1시간33분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특징 온라인 밈 전쟁을 이해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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