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과 여성은 어제 우연히 같은 술집에 있었다. 늦은 밤 같은 시간에 술집을 빠져나왔다. 남성은 그 술집에서 불쾌한 경험을 했다. 여러 번 부르고 손을 흔들어도 모른 체하던 바텐더가 그보다 늦게 온 아름다운 여성의 주문을 친절히 먼저 받았다. 주문이 늦어져서 그는 화가 났다. 집에 오는 길엔 개똥을 밟아 아끼는 운동화를 망쳤다.
#남성은 다음날 여성을 만나 전날의 불쾌한 경험을 털어놓다가 조금 머쓱해진다. 여성이 들려준 어젯밤 이야기는 이랬다. 웬 남자가 갑자기 당신의 술까지 결제했다며 치근덕댔고, 거절하자 무례한 반응을 보냈다. 친구들과 헤어져 홀로 집에 가는데 아까 그 남성이 큰 소리로 “한 번 만나보자”며 쫓아왔다. 여성은 언제든 전화를 걸 수 있도록 휴대폰에 911 번호를 눌러둔 다음 집까지 뛰었고, 남성은 기어코 건물 안까지 따라 들어와 문을 두들겼다.
한국의 젊은 세대를 절반으로 갈라놓은 젠더 갈등은 경험의 차이에서 온다. 한쪽은 세상이 바뀌었는데도 여전히 일상을 위협하는 위험과 편견을 들며 차별받는다 느끼고, 다른 한쪽에선 우리 세대는 오히려 역차별 받는다고 주장한다. 모든 성별이 평등하다는 당연한 진리 앞에서도 양쪽은 좀처럼 중간 지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같은 세상을 살지만 경험은 너무나 다르다.
미국 코미디 드라마 ‘마스터 오브 제로(원제 : Master of None)’는 이 사이 어느 곳에서 합의점을 찾으려 한다. 인도계 미국인 코미디 배우 아지즈 안사리(Aziz Ansari)가 각본·연출·주연을 맡은 이 드라마는 2015년 첫 시즌이 공개된 후 두 차례 에미상 각본상을 받은 수작이다. 30분 내외의 회차를 각각 다른 주제로 풀어가는 시트콤 형식이다. ‘페미니즘’을 주제로 한 회차는 하나뿐이지만, 자신을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페미니스트’로 규정하는 안사리의 가치관과 유머가 드라마 전체를 관통한다.
뉴욕에서 무명 배우로 일하는 인도인 데브(아지즈 안사리)와 친구들의 일상을 그린 로맨틱 코미디다. 서른 즈음의 주인공들은 우리와 비슷하게 산다. 데이트앱으로 하루 수십명의 프로필을 들여다보고, 너무 많은 선택지 앞에서 갈팡질팡한다. 지금 하는 일이 즐겁지 않아 미친 척 관두기도 하고, 좋은 기회로 승승장구하다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기도 한다. 부모와 가끔 의견 차이를 보이지만 사랑하고, 늙어간다는 것에 대해 고민한다.
꿈, 커리어, 연애, 노인, 부모님, 페미니즘, 인종 차별, 이민자, 결혼, 육아 등 일상적인 주제들을 젊은 세대의 입장에서 풀어간다. 민감한 현실을 반영하지만 결코 무겁지 않다. 시즌 10까지 이어지는 대작이나 숨 가쁜 막장·범죄 드라마에 지친 이들에게 추천한다. 시즌 1은 6년 전 작품이지만 지금의 현실과 위화감이 없다. 호평받은 에피소드를 일부 골라 소개한다.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다.
◇”너무 과하게 생각하는 거 아냐?”
시즌 1의 ‘신사 숙녀 여러분’엔 안사리 본인의 경험담이 담겼다.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도 여성과 남성의 경험이 다르단 걸 깨달은 데브는 ‘여자로 사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
어렵게 정원 용품 광고에 캐스팅된 데브는 남성 세 명이 바비큐를 굽고, 그들 중 한 명의 부인이 레모네이드를 가져다주는 장면이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남성은 뚱뚱해도 괜찮지만, 여성 모델은 예뻐야 한다. 감독도 그의 생각에 동의한다. 다음날 감독은 데브의 지적대로 광고를 수정한다. 바비큐 굽는 남자 1이던 그의 역할은 쪼그라들다 못해 사라져버렸다.
누군가 제자리를 찾으려면 그 자리를 차지했던 이가 양보하는 수밖에 없었다. 데브는 이렇게 항변한다. “내가 해고 안 되고 손해도 안보는 다른 방향이 있잖아요”. 그는 결국 일자리를 잃는다. 여성들은 “우리 분량이 많아진 건 좋지만, 네가 못 나오는 걸 바라진 않았다”며 남성들의 상실감을 이해하게 된다. 현실에서 이런 일이 어려운 건 서로의 탓이 아니라 그런 여유를 부리기 힘들 만큼 삶이 팍팍해서일 테다.
차별에 민감한 여성들을 ‘예민하다’고 단정 짓는 일에 대해서도 다뤘다. 남성 감독이 여성들은 건너뛰고 남성들과 악수한 데 대해 여자친구가 분노하자, 데브는 “여자라서 인사 안 했다는 건 너무 지나치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라고 묻는다. “단지 상대가 여자라는 이유로 인사하지 않는 나쁜 사람이 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어.”
여성은 말한다. “당신이 성차별 괴물이란 얘기가 아니야. 수많은 작고 미묘한 일들이 이 진보된 세계에서도 나와 여자들에게 일어나는데. 어떤 사람이, 특히 내 남자친구가 내 경험을 알지도 못하면서 ‘틀렸다'고 말하는 게 모욕적이라는 거야.” 그는 답한다. “자기 입장이 되는 게 어떤 건지 내가 알 길이 없으니. 더 귀를 기울일게.”
아지즈 안사리는 2017년 ‘불편한 성관계’ 논란으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의 행위가 ‘성폭력’인지를 두고 페미니즘 진영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여성의 일방적 폭로를 두고 ‘리벤지 포르노’라는 비판도 나왔다. 그는 이후 “당시 전적으로 합의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사과했고, “나뿐 아니라 다른 남성들도 이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들었다면, 그런 순간에 상대가 편안한지를 확인하게 되었다면 그건 좋은 일”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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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플 시대'의 사랑법
사랑을 다룬 일화들도 흥미롭다. 뉴욕대 사회학과 교수와 함께 수백명을 인터뷰해 소셜미디어 시대의 사랑에 관해 ‘모던 로맨스’라는 책을 썼던 아지즈 안사리는 ‘데이트 앱’에 관한 한 도사다. 드라마는 마음만 먹으면 1분에 수십 명 연애 후보의 프로필을 훑어볼 수 있는 밀레니얼의 데이트를 재치 있게 담았다.
시즌 2의 한 에피소드는 데이트앱에서 만난 수많은 여성과의 첫 데이트 대화만 30분 간 이어진다. 사람은 바뀌어도 첫 데이트의 모습은 모두 비슷하다. 공백을 피하기 위해 의미 없이 주고받는 대화와 호감 있는 척 연기하는 모습, 함께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사람을 찾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지친다. 회차를 끝내고 나면 데이트가 끝난 후 찾아오는 공허함을 함께 느낀다.
운 좋게 사랑을 찾는다 해도 쉽지 않다. 육아 고민으로 시작한 첫 번째 시즌은 결혼에 대한 고민으로 끝난다. 데브와 여자친구 레이첼은 친한 친구의 결혼식장에서 로맨틱한 맹세를 들으며 마음속으로 다른 생각을 한다. “젠장. 저런 사랑이 정말 존재해? 의문도 두려움도 없는?” “결혼하는 게 지금으로선 안전하겠어. 이제 결혼하고 애 낳고 늙어서 죽는 거지. 정해진 대로 사는 거야.” 남들 보기에 ‘정상적인’ 인생을 살기 위해, 혹은 그저 결혼 적령기라서, 100%가 아닌 사람과의 결혼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추천하는 에피소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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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지
부모와의 관계를 다룬 회차들이 특히 인상 깊다. 이 드라마는 2016년 시즌 1의 ‘부모님’ 에피소드, 2017년 시즌 2의 ‘추수감사절’ 에피소드로 에미상 각본상을 받았다.
의사가 되기 위해 미국에 이민 온 주인공 데브의 부모 역은 실제 아지즈 안사리의 부모들이 맡았다. 아마추어라고는 믿기 어려운 코믹 연기로 신스틸러를 도맡는다. 어렵게 자란 데브의 부모는 “내 자식은 하고 싶은 걸 뭐든 하게 해주겠다”는 일념으로 헌신한다. 어릴 적 자신은 갖지 못했던 기타를 마음껏 사주고 일찌감치 컴퓨터도 사줬다.
그의 바람대로 다 큰 데브는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산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이패드를 잘 만지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답답해 하고, 고장 난 아이패드를 고쳐달라는 부모님 부탁은 거절한다. 부모는 씁쓸하게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한다.
드라마는 때로는 부모를 실망시키고, 자식을 힘들게 하고, 그러면서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부모·자식 간의 이야기를 따뜻하게 그려낸다. ‘부모라는 이유로 자식에게 종교를 강요할 수 있을까?’와 같은 무거운 주제 역시 유쾌하게 다룬다. 에미상 수상 각본 ‘추수감사절’은 데브의 친구이자 레즈비언인 드니즈가 가족들에게 성 정체성을 커밍아웃하고 이해받기까지의 긴 과정을 섬세하게 그렸다.
◇젊음과 나이 듦에 대하여
데브는 참전 용사인 친구 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겪으며 나이 든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나를 찾는 이들이 줄어들고, 주변 사람들은 한두 명씩 떠날 때, 그들을 위로하는 건 고작 로봇 물개인 ‘파로’다. 자식들은 본인들 편하자고 요양원에 부모님을 모시고,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않는다. 손자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의 로봇 물개를 데려와 돌보며 그제야 할아버지의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손녀딸은 요양원을 몰래 빠져나온 할머니가 재즈바에서 멋지게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본 후에야 나이 들었다고 마음마저 나이 들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어내는 젊은이들의 심리도 섬세하게 그렸다. “우리 나이쯤 되면 큰 변화를 꾀할 기회가 사라지는 것 같아. 천천히도 아니고 갑자기 쾅 하고 닫혀버리지. 정신 놓고 살다가 어느 순간 살다 보니 무릎 위엔 애가 있고, 그렇게 끝날 거 같아.” 불확실한 미래와 흔들거리는 커리어로 고민하는 젊은 세대를 위로한다.
시즌 1~2의 로튼토마토 평점은 100%. 23일 공개된 시즌 3의 평점도 86%로 나쁘지 않다.
개요 드라마 l 미국 l 2015~2021 l 시즌 3
등급 18세 관람가
특징 누구도 불쾌함 없는 코미디
평점 로튼토마토🍅100% IMDb⭐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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