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노멀 피플'의 한 장면. '코넬' 역의 폴 메스칼(왼쪽)과 메리앤 역의 데이지 애드가 존스./웨이브·© EP Normal People Limited MMXIX

한국 드라마엔 섹시한 섹스신이 없다. 드라마 ‘나쁜 남자’의 오연수·김남길처럼 손가락만 문질러도 야하거나, ‘밀회’처럼 암시만으로 아찔한 경우는 가끔 있다. 그러나 본선전에만 돌입하면 유독 소심해져 실소를 유발하는 게 K-드라마의 한계다.

19금(禁) 딱지를 붙이고도 코믹 신(Scene)으로 전락한 ‘부부의 세계’ 베드신이 대표적이다. 김희애가 상대 배우 김영민(‘사랑의 불시착’의 귀때기 역)을 반복해서 밀쳐 눕히고, 그는 오뚝이처럼 벌떡벌떡 일어난다. 결국 이 장면엔 ‘귀뚜기(귀때기+오뚝이)’ ‘패대기’란 별명이 붙어버렸다.

베드신에 유독 엄격한 방송 심의 탓을 안 할 수 없다. 그 사이 해외에선 금기를 깨는 TV 드라마들이 등장하고 있다. 지난해 4월 영국 BBC와 아일랜드 국영방송 RTE, 미국 훌루(Hulu)에서 방영한 드라마 ‘노멀 피플’은 섹스신을 중심으로 밀레니얼의 혼란과 사랑을 섬세하게 묘사한 수작이다. 2018년 맨부커상 후보에 오른 동명 소설을 드라마로 각색했다.

현지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2020년 BBC에서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시리즈로, 홈페이지 스트리밍 조회 수만 6270만 회로 집계됐다. 아일랜드에선 최종화 시청률이 33%를 넘었다.

◇서로를 구원하는 밀레니얼의 사랑

"너는 나를 사랑해주었지. 그리고 마침내 평범하게 만들어 주었어"./웨이브·© EP Normal People Limited MMXIX

작품은 두 남녀의 학창시절부터 대학 생활까지 4년의 시간을 그린다. 축구부 주장으로 두루 인기 많은 남학생 코넬은 사실 학교의 공식 왕따인 메리앤과 방과 후 몰래 자는 사이다. 그의 어머니는 열일곱에 미혼모로 코넬을 낳았고, 메리앤 집에서 청소부로 일한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진 않지만 밝고 사랑이 넘치는 어머니 아래 자란 코넬. 반면 매리엔은 부유하지만 아내와 자식을 학대한 변호사 아버지 아래서 자랐고, 아버지가 죽은 후엔 오빠가 그 학대를 이어갔다. 어머니는 방관한다.

대외적으로 코넬은 운동을 즐기는 쿨한 남자지만 혼자 있을 땐 책 읽고 글 쓰는 일에 푹 빠져 있다. 친구들이 여자친구의 벗은 사진을 돌려 보며 낄낄댈 때 코넬은 같이 웃기 힘들다. 메리앤은 그런 그의 본모습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다. 남들에게 차갑고 공격적인 메리앤이 실제로는 섬세하고 사려 깊다는 사실도 코넬만 안다.

코넬 역의 폴 메스칼./웨이브·© EP Normal People Limited MMXIX

하지만 코넬은 두 사람의 관계를 숨기고 싶다. 모두가 욕하는 학교 왕따와 그렇고 그런 사이란 게 알려지면 친구들 무리에서 도태되고 학교생활이 끝장날 것만 같다. 그 마음이 메리앤에게 상처가 돼 둘은 결국 헤어진다. 그는 졸업할 때가 되어서야 알게 된다. 사실 모두가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는 걸. 당연하게도 인생은 끝장나지 않았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이들의 관계는 쭉 이런 식으로 흐른다. 서로가 서로에게 최선인 걸 알지만, 진심을 전하지 못해 가까워졌다 헤어지는 일을 반복한다.

◇”돈은 불공평해. 그런데 뭔가 섹시한 데가 있어”

/웨이브·© EP Normal People Limited MMXIX

때때로 사회적 계층이 두 사람의 안정적인 관계를 방해한다. 작품에서 코넬을 ‘노동자 계급 출신’이라 칭하는 모습은 낯설지만, 면면은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두 사람 모두 우등생으로 아일랜드 최고 공립 대학인 더블린 트리니티대학교에 진학하는데, 여기서 두 사람의 처지가 완전히 바뀐다.

코넬은 작은 시골 마을에선 인기 있는 남자였지만 트리니티에선 노동자 계급의 가난한 학생으로 겉돈다. 반면 오만한 부자라고 따돌림 당하던 메리앤은 수도 더블린과 부유한 대학 동기들 사이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그는 가끔 엄마가 메리앤 집에서 번 돈으로 메리앤과 데이트를 한다.

코넬은 시간이 흘러 전액 장학금을 받고 나서야 본인을 둘러싼 모든 환경을 현실로 인식한다. 메리앤 아버지의 별장으로 여행 갔을 때 그는 말한다. “돈은 참 대단해. 세상을 현실로 만들어 주잖아. 외국 도시들도 진짜였고, 예술 작품도 진짜였구나”. 메리앤은 돈 걱정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코넬에게 세상을 현실로 만드는 핵심은 돈이다.

◇베드신만 41분 15초… 야한데 야하지 않다

HULU

이렇게나 다른 두 사람은 극 중에서 각각 다른 이유로 망가져 간다. 그러다 결국 서로를 치유하며 ‘노멀 피플(평범한 사람)’이 되어가는 이야기다. 이 과정에서 섹스를 떼어 놓고 말할 수 없다. 영국 ‘더 선’은 “‘노멀 피플'에 섹스신만 41분 15초”라고 보도하면서 “드라마의 12%가 키스·섹스나 전희로 가득 차있다. BBC 역사상 가장 선정적인 드라마”라고 썼다. ‘더 타임스’도 “섹스 장면을 빨리 넘기면 드라마를 45분 만에 몰아볼 수 있다”는 제목의 리뷰를 썼다.

그런데도 과하단 느낌은 들지 않는다. 모든 장면이 철저히 그들의 감정과 심리 상태를 전달하는 데 사용되기 때문이다. 이들의 섹스신은 대화하는 장면처럼 느껴진다. 눈빛, 손짓, 근육, 붉게 물드는 피부가 대사 한 마디보다 낫다. 둘 사이의 안정감뿐 아니라 우울과 좌절, 불안감도 선명하게 드러낸다.

웨이브·© EP Normal People Limited MMXIX

전라(全裸)로 여러 번 등장하는 주연 배우 폴 매스칼은 한 인터뷰에서 “책 자체가 본능적이고 날 것이었다. 내가 그 책을 읽었을 때 내 머릿속에서 그 캐릭터는 분명 나체였기 때문에, 노출 장면 없이는 이 작품을 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극 후반부에선 매리엔의 불안정한 심리 상태가 성적인 언어로 드러난다. 폭력에 시달리며 자라온 메리앤은 피학적 성관계로 스스로를 망치고 학대한다. “어떤 일도 네 탓이 아니야. 다른 사람들이 때때로 널 나쁘게 대한다고 해서 네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건 아니야. 많은 사람이 널 사랑하고 널 걱정하고 있어”. 위험한 상황에서 떠오른 코넬의 말이 결국 그를 구원한다.

◇성관계 시 ‘동의(consent)’의 정석이자 입문서?

HULU

극 중 코넬이 매리엔과 처음으로 관계를 맺기 전 콘돔을 준비하며 뱉은 대사가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TV에서 10대의 성관계를 다룰 때 쾌락을 위한 단순한 일탈이나 설렘만 가득한 이벤트, 충동적인 순간으로 그려왔기 때문이다. 첫 경험에서 “싫다”거나 “그만하고 싶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걸 아는 여성들 사이 특히 환호가 쏟아졌다. “‘동의(consent)’의 개념에 대한 입문서”라는 기사까지 나왔다.

아일랜드 국가여성위원회의 이사는 한 언론에 “방송에서 성관계를 묘사할 땐 ‘동의’와 ‘상호 즐거움’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 최근 ‘노멀 피플’에서의 단순한 동의 장면 묘사가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확인했다”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또 다른 단체는 교육부에 공개 서한을 보내 “합의된 섹스의 올바른 예”라며 학교에서 교육자료로 활용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실제로 제작진은 이들의 베드신을 건전하게(?) 연출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일반적으로 베드신에선 여성의 신체와 반응에 초점을 맞추지만, 이 드라마에선 남녀의 노출 정도와 빈도를 거의 동일하게 맞췄다. 그 과정에 ‘인티머시 코디네이터(intimacy coordinator)’ 역할이 컸다. 유명 인티머시 코디네이터 이타 오브라이언이 안무를 짜듯 동작 하나하나를 연출하고 접촉과 노출 수준을 미리 협의했다. ‘즉흥 연기’가 배우들에게 불쾌감을 주거나 성범죄로 이어지는 걸 막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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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래도 10대의 섹스라니!

노멀피플 감독 레니 에이브러햄슨의 트위터. 아일랜드 RTE 라디오 '라이브라인' 진행자 조 더피가 라디오에서 노멀피플 시청자들의 항의 전화를 받는 모습./트위터 캡쳐

그러나 편안한 주말 저녁 부모님이나 자녀와 베드신을 함께 보고 싶지 않은 건 우리만의 얘기가 아니다. 아일랜드 공영 방송사엔 방영 중 베드신과 관련해서만 50여 건의 항의가 들어오기도 했다. 10대의 섹스를 다뤘다는 점에서 더 논란이 됐다. 두 사람이 19세에 첫 관계를 맺는 장면은 연속해서 9분 넘게 이어졌다.

“성적 동의 연령인 17세를 넘겼는데 뭐가 문제냐” “이미 당신의 자식들은 인터넷에서 더 노골적인 장면을 보고 있다”는 의견들이 나왔지만, 비판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아일랜드 공영 라디오 ‘라이브라인’에선 ‘노멀 피플’을 주제로 전화 토론까지 벌였다.

‘메리’라는 청취자는 “청소년들의 성행위와 과도한 노출이 거의 포르노 영화급”이라며 볼멘 소리를 했다. “학생들이 성관계 갖는 것을 일반화하려는 시도다” “공영 방송이 음란함을 조장한다”는 의견들도 나왔다. 영국 텔레그레프는 칼럼에서 “여기는 프랑스가 아니다. 가슴을 다 보여주기엔 극 중 매리엔이 너무 어리다'고 썼다.

◇”밀레니얼 세대의 샐린저” 원작에 쏟아지는 극찬

웨이브·© EP Normal People Limited MMXIX

드라마의 폭발적인 인기는 어느 정도 원작 소설 ‘노멀 피플’의 인기 덕을 봤다. 2018년 출간 이후 ‘뉴욕타임스’ ‘타임’ 등 주요 언론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됐고, 세계 각국 언어로 번역돼 100만부 넘게 팔렸다. 91년생인 작가 샐리 루니에겐 ‘프레카리아트의 제인 오스틴’ ‘더블린의 프랑수아즈 사강’ ‘밀레니얼 세대의 셀린저’란 화려한 수식어가 붙었다.

샐리 루니가 드라마 각본에 직접 참여했다. 그래서인지 책의 장면과 대사들이 거의 각색 없이 그대로 화면에 옮겨졌다. 소설과 드라마는 각각 그 자체로도 재밌지만, 당초 세트로 만든 듯 함께 보면 더 좋다. 드라마 속 인물들이 창밖을 멍하니 보거나 침묵할 때, 그들 머릿속에 어떤 생각들이 오가는지 책으로 확인하는 즐거움도 있다.

  • 개요 드라마 l 아일랜드 l [시즌1] 8회 (회당 40~50분)
  • 등급 18세 이상 관람가
  • 각본 샐리 루니
  • 특징 누군가를 좋아해서 삶 전체가 달라지는 경험
  • ⭐평점 IMDb 8.5/10 🍅로튼토마토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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