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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유튜브를 통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부정축재를 고발한 러시아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44)의 다큐멘터리가 세계적인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 영상으로 러시아에선 나발니 석방을 요구하는 대중 시위가 열렸고, 미국, 독일, 프랑스 등 서방 국가들도 그의 석방을 압박 중이다. 나발니는 이전에도 연일 정권 비판 발언을 쏟아내, 푸틴의 강력한 정적으로 꼽혀 왔다. 특히 지난해 8월 러시아 정부 소행으로 추정된 독약 테러를 당한 뒤 독일에서 5개월 간 치료를 받았고, 올해 귀국하자마자 모스크바 공항에서 곧바로 체포돼 수감됐다. 그 이틀 뒤 나발니는 관계자를 통해 푸틴 고발 영상을 공개한 것이다. 이런 점이 푸틴의 분노를 샀는지, 지난 3월 러시아 법정은 나발니가 2017년 이미 금품 수수 혐의에 대해 선고 받았던 집행유예를 취소하고, 3년 6개월 형을 다시 선고했다. 이후 감옥에서 나발니는 걷지 못 할 수준으로 건강이 악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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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나발니의 영상보다 앞서 푸틴의 분노를 샀던 다큐가 있다. 바로 러시아 푸틴 정부가 지지율을 올리기 위해 직접 올림픽 도핑(성적 향상을 위해 경기 전 약물 복용) 스캔들에 가담한 정황을 고발한 넷플릭스 제작 다큐 ‘이카루스’다. 2017년 공개돼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 장편 다큐멘터리 상을 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넷플릭스 제작 영화로는 처음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쥔 것도 화제였지만, 단순 의혹 제기가 아닌 철저한 탐사 취재로 러시아의 국가 주도 도핑 스캔들을 조명한 것이 큰 호평을 받았다.
스포츠와 정권 부정 축재. 얼핏 봐선 달라 보이는 두 주제지만, 나발니의 영상과 이카루스를 한데 모아 보고 나면 결국 같은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될 것이다. 바로 ‘종신 집권을 노리는 정권의 야욕과 부정부패’에 대한 경고 말이다.
◇도핑 밝히려면 일단 도핑을 해라?
이카루스는 도입부부터 발칙한 발상을 내보인다. 감독이자 주인공 브라이언 포겔이 러시아 선수들의 도핑 스캔들을 밝히겠다며, 그 방법으로 ‘직접 도핑 시도’를 택하기 때문이다.
동기는 ‘팬심’이었다. 브라이언은 자신이 동경하던 사이클링 선수 랜스 암스트롱이 2012년 주변 동료들의 폭로로 미국 반(反) 도핑기구(U.S Anti-Doping Agency)에서 도핑 사실을 적발당했을 때 크게 상심했다고 말한다. ‘수백 번 약물 검사에서도 걸리지 않았다’며 혐의를 부인하던 암스트롱은 결국 2013년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약물 복용 사실을 인정했다.
이에 브라이언은 말한다. “랜스 암스트롱이 그동안 500번이 넘는 약물 검사에 걸리지 않았다면, 이건 시스템에 결함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영웅이 무너진 이유를 알기 위해 ‘직접 몸으로’ 이 시스템 결함을 증명하기로 마음먹는다.
방법은 과학자를 섭외해 ‘약물 검사에 걸리지 않는 도핑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이에 따라 직접 몸에 약물을 주입한 뒤 프랑스 알프스 산맥을 넘는 아마추어 사이클링 대회 ‘오트 루트’에 출전하는 것. 이 계획을 위해 브라이언은 미국 UCLA 올림픽연구소의 창립자인 돈 캐틀린의 오랜 친구이자 모스크바 올림픽연구소 소장인 그리고리 롯첸코프를 소개 받는다. 그리고 이 둘의 만남은 예기치 못한 나비효과를 불러온다.
◇도핑 방법 알려주는 반도핑연구소장?
브라이언은 그리고리의 조언대로 본인의 엉덩이에 호르몬 주사를 놓고, 자기 소변을 채취한다. 그러던 중, 그리고리가 올림픽 등 세계 스포츠 대회에서의 도핑방지시스템을 운영하는 세계반도핑기구(WADA, World Anti Doping Agency) 산하 러시아 연구소의 수장이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세계반도핑기구는 각국 선수들의 도핑 검사를 모두 직접 하는 게 아니라 각 나라의 연구소를 인증해주고 이 연구소가 자국 선수들의 도핑 검사를 하도록 한다. 그런데 이 인증을 받은 곳인 러시아반도핑기구(RUSADA) 산하 모스크바 연구소의 소장이 바로 그리고리였던 것이다. 러시아 선수들의 도핑 여부를 검사해 이를 막아야 할 사람이, 브라이언에겐 ‘도핑 잘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던 셈이다. 이를 알게 된 브라이언은 큰 혼란에 빠진다.
얼마 후 브라이언은 또 다른 소식에 경악하게 된다. 독일 공영 방송국 ARD를 통해 러시아 내부 고발자들이 “그리고리 주도 하에 러시아 육상 선수 대부분이 약물을 복용하고도 도핑 테스트에 걸리지 않도록 했다”고 폭로한 내용이 보도된 것이다. 그리고 2015년 9월, 세계반도핑기구의 독립위원회 조사위는 해당 의혹이 상당 부분 사실이라며 그리고리의 연구소장 직위를 해제하고 러시아의 2016년 리우 올림픽 출전 금지를 권고한다. 그럼에도 푸틴 대통령은 관련 사실에 대한 국가 개입을 전면 부인하며 “잘못을 저지른 ‘개인’에게 확실히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모습을 보고 숙청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진 그리고리는 브라이언의 도움으로 러시아를 탈출해 미국에서 푸틴을 고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리는 다큐 내내 러시아 정부와 산하 정보기관 KGB 요원들이 어떻게 선수들의 도핑 검사 조작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는지를 상세하게 폭로한다. 특히 “푸틴의 직접 지시가 있었다”며, 목적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앞두고 지지율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고도 주장한다. “2008년 90%대에서 2014년 60%대까지 떨어졌던 푸틴의 지지율이 (도핑으로 금메달 13개를 땄던 소치)올림픽 개막 후 85% 이상으로 급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닮은꼴 현재
다큐는 이 같은 일련의 폭로와 WADA의 권고에도 IOC(국제올림픽위원회)가 러시아의 리우 올림픽 출전을 허용하고, 정작 그리고리는 러시아 정부의 각종 압박으로 이를 피해 미 정부의 증인보호프로그램에 들어가는 답답한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그 후 현실에선 나름 통쾌한 일들이 이어졌다. 리우올림픽에서는 걸리지 않고 통과했던 러시아가 지난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때에는 또 다시 국가 주도 도핑 사실이 발각돼 러시아 국가 이름을 달지 못하게 됐다. 러시아 선수들은 IOC로부터 ‘러시아 출신 올림픽 선수(Olympic Athlete from Russia·OAR)’ 자격으로만 경기 참가가 가능하단 통보를 받은 것이다. 러시아 선수들은 경기 내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홍길동처럼 ‘러시아를 자국이라 하지 못 하고 국기도 못 쓴다’는 국제적 망신을 감당해야 했다. 그러고도 러시아는 2019년에도 국가 주도의 도핑 조작을 한 사실이 재차 적발돼 올해 도쿄 하계올림픽과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도 자국 국기와 국가를 쓸 수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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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나발니의 폭로 역시 다큐 이카루스가 공개됐던 20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과거로부터 쭉 이어져 온 현재 진행형의 사건임을 알 수 있다. 나발니는 지난 2017년 3월에도 “푸틴의 심복인 메드데프 총리가 친정부 기업의 기부금을 빼돌리는 방식으로 호화 대저택, 요트, 포도 농장 등을 취득해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블로그 글로 모스크바 시위를 촉발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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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리와 나발니가 겪었다고 주장하는 러시아 정부로부터의 위협 또한 놀랍도록 닮아 있다. 이카루스 속 그리고리는 러시아 정부가 자신의 폭로의 대가로 과거 자신의 정신병력을 언론에 공개하고, 가족의 재산을 압류했다고 호소한다. 도핑 스캔들에 연루된 동료가 갑작스런 심장질환으로 사망했다며, 독극물 테러에 대한 두려움도 드러낸다. 모두 나발니가 최근 겪은 위협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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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두 사건 모두 ‘독일’이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는 것도 공통점으로 꼽을 수 있겠다.
이야기 방식도, 주제도 다르지만 상당 부분 닮은 구석이 많은 두 다큐. 아마도 이 둘이 치열하게 경계했던 것은 이카루스 속 그리고리가 평소 애독서라며 읊는 조지 오웰의 ’1984’ 속 아래 문구와 같은 상황이 아니었을까.
개요 다큐멘터리 l 미국 l 2시간1분
등급 15세 관람가
감독 브라이언 포겔
특징 상상을 초월하는 부패의 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