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 워홀의 '진짜' 작품, 캠벨 수프 캔. /MoMA

2011년 11월, 165년 역사를 자랑하던 미국 뉴욕의 유명 화랑 노들러 갤러리(Knoedler Gallery)가 문을 닫았다. 이곳은 남북전쟁과 1·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도 20세기 내내 살아 남은 문화 유산이었다. 이 화랑에서 ‘중개’된 예술은 숭고했고, 그만큼 문턱도 높았다. 주 고객은 제이피 모건, 헨리 클레이 프릭 같은 억만장자들이었다.

2011년 문 닫은 미국 뉴욕 노들러 갤러리 모습. /넷플릭스 '당신의 눈을 속이다: 세기의 미술품 위조사건'

그런 역사와 전통의 노들러 갤러리가 폐업했다. 고고한 예술의 끝맺음은 추악한 사기극이었다. 넷플릭스 다큐 ‘당신의 눈을 속이다: 세기의 미술품 위조사건(Made You Look: A True Story About Fake Art·2020)’은 미국 사상 최대 미술품 사기로 꼽히는 ‘노들러 갤러리 위작 사건’의 전말을 그린 작품이다. 심미안(審美眼)을 가졌다는 미술 전문가들과 큐레이터, 억만장자 애호가들이 위작 사기단에게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게 된 경위를 기록했다.

◇Stream or Skip?…볼까말까 고민될땐

긴장감 넘치는 편집 기술이나 꼼꼼한 취재가 돋보이는 다큐는 아니다. ‘지대넓얕(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을 쌓는 차원에서 추천한다. 미술계에 충격을 안긴 초대형 스캔들이었음에도, 국내에서 큰 이슈가 된 적이 없기 때문. 책 읽자니 버겁고, 그렇다고 연예인 뛰어다니는 예능 프로는 틀어 놓기 싫은 날, 가볍게 훑어보길 권한다.

미술품 경매 모습. /넷플릭스 '당신의 눈을 속이다: 세기의 미술품 위조사건'

뉴욕에서 10년 넘게 벌어졌던 이 거대한 사기극은 박수근, 이중섭, 천경자, 이우환 등 유명 화가들의 위작 논란이 끊이지 않는 한국 현실과도 크게 다르지 않기에 참고할 만하다. 다큐에 나오는 가짜 그림은 매우 정교해서, 그 자체로 집에 걸어두고 싶을 만큼 아름답다. 그래서 이 다큐는 시청자에게 예술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툭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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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을 넘어, 요즘 미술 시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미술품 분할 소유’ ‘NFT(대체 불가능 토큰) 예술 시장’이 태동하는 이유까지 떠올려 볼 수 있다면 다큐는 나름 괜찮은 선택이 될 것이다.

◇백만장자 이혼소송의 나비효과

최고의 명성을 자랑했던 노들러 갤러리는 1995년부터 2008년까지 무려 13년에 걸쳐 로버트 마더웰,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같은 추상 표현주의 대가들의 가짜 그림 8000만달러(약 800억원) 어치를 유통했다.

영국 백만장자 피에르 라그랑주(오른쪽)의 이혼 전 사진. /넷플릭스 '당신의 눈을 속이다: 세기의 미술품 위조사건'

진실은 한 영국 백만장자의 이혼 소송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노들러 갤러리에서 2007년 잭슨 폴록 작품(1950년작)을 1700만달러에 구입한 런던 헤지펀드 운용사 대표 피에르 라그랑주가 이혼 위자료 마련을 위해 작품을 다시 내놨다가 위작 판명을 받은 것이다. 법 과학자들은 그림에 쓰인 노란 페인트가 폴록이 사망한 1956년보다 훨씬 뒤인 1970년에 생산된 제품이라고 분석했다.

가짜 잭슨 폴록 그림. /넷플릭스 '당신의 눈을 속이다: 세기의 미술품 위조사건'

라그랑주는 노들러 갤러리를 찾아가 상소리를 쏟아냈고, 이를 언론에도 알렸다. 2011년 수사가 시작됐다. 억만장자들에게 팔려나간 가짜 그림 60여점이 고구마 줄기처럼 우르르 세상 밖으로 쏟아졌다.

노들러 갤러리 대표였던 앤 프리드먼. /넷플릭스 '당신의 눈을 속이다: 세기의 미술품 위조사건'

◇중국인 길거리 화가, 알고 보니 천재 모사꾼

가짜 그림을 그린 화가는 맨해튼 길거리에서 그림을 그리던 중국인 천 페이선이다. 그는 마치 사진처럼 정확하게 모사하는 중국 전통 화법에 익숙했고, 제각기 다른 추상주의 화가 7~8명의 스타일을 깨우쳤다. 훗날 “어떻게 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 화가들의 화법에 통달할 수 있느냐”며 미술계가 큰 충격에 빠질 만큼, 그는 베끼기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맨해튼 길거리 화가 출신인 중국인 천 페이선은 800억원대 가짜 그림을 직접 그린 천재 모사꾼이었다. /넷플릭스 '당신의 눈을 속이다: 세기의 미술품 위조사건'

사기극을 설계한 작가는 스페인 위작 사기범 여자친구인 글라피라 로잘리스였다. 그녀의 목표물은 우아하지만 좀 맹한 구석이 있는 노들러 대표 앤 프리드먼이었다. 솜씨 좋은 사기꾼은 훌륭한 심리학자이며, 상대의 욕구와 갈망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글라피라는 예의 바르고, 옷을 잘 입었으며, 조용 조용 말했다.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게 언제나 적당한 정보만을 언급했고, 오랜 기간에 걸쳐 조금씩 상대에게 다가갔다.

위작 사기극을 설계한 여성 글라피라 로잘리스. /넷플릭스 '당신의 눈을 속이다: 세기의 미술품 위조사건'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멕시코 Mr.X(미스터 엑스)의 아들이 유산을 처분하려고 한다. 현금 결제 시 시가의 10분의 1까지 쳐줄 수 있다’는 황당한 스토리에 화랑 대표는 결국 눈이 멀고 말았다.

진품을 구별하지 못했던 전문가들은 가짜 그림들을 보며 극찬했다. 로스코 가문에 고용돼 직접 도록을 만들기도 했던 한 전문가는 가짜 로스코 그림을 보자마자 “아름답다”고 감탄했다. 미국 국립미술관, 뉴욕 현대미술관도 속았다. 10여 년이 지나도록 미술계의 어느 누구도 노들러를 의심하지 않았다.

◇공범이 될 것인가, 멍청한 피해자로 남을 것인가

이혼 소송이 쏘아 올린 나비효과로 검찰 수사와 재판이 이어졌다. 프리드먼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형사 처벌을 피하려면, 공범이 아니라 멍청하게 속아 넘어간 ‘엉터리 화랑 대표’가 돼야 했다. 진짜 피해자들과는 물밑에서 금전 합의에 나섰다. 손해 배상은 2019년 7월에서야 마무리됐고, 노들러 갤러리는 불명예를 떠안고 퇴장했다. 화가 천 페이선은 중국 상하이로 도주. 결국 장기판의 졸(卒)이었던 설계자 글라피라만 9개월 가택 연금 처벌을 받고 이 사건은 종결됐다.

세계적인 미술품 경매기업 소더비의 회장이자, 명품 패션 브랜드 구찌 회장을 지낸 도메니코 드 솔레(왼쪽) 부부. /넷플릭스 '당신의 눈을 속이다: 세기의 미술품 위조사건'

가짜 그림을 구입한 피해자 중에는 저명한 미술 애호가도 여럿 있었다. 하버드 법대 출신 변호사로 세계적인 미술품 경매기업 소더비 회장이자, 명품 패션 브랜드 구찌 회장까지 지낸 도메니코 드 솔레도 그 중 하나였다. 그는 노들러에서 가짜 로스코 그림을 830만달러에 구입했다.

가짜 로스코 그림(왼쪽). 마크 로스코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부인 김건희 코바나컨텐츠 대표가 지난 2015년 한국에서 대규모 전시를 기획하기도 했던 추상주의 거장이다. /넷플릭스·조선일보DB

법정에서 판사가 “소더비 회장이면서 어떻게 그림에 대해 잘 모를 수가 있느냐”고 묻자 그는 “나는 ‘가방(구찌) 팔이’일 뿐”이라고 했다. 로스코의 아들이 진품이라고 하는 데다, 미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화랑인 노들러 브랜드를 존경했기에 그대로 믿었다는 것이다.

◇어차피 예술은 사기다!

미술품 경매장에 피카소 작품이 등장하면, 사람들은 숨을 죽인다. 그러다 거액 낙찰이 터지면, 그제서야 환호하고 박수 친다. 뉴욕 작가 프랜 리보위츠는 “그렇게 좋은 예술품이면 왜 작품이 등장하는 순간에는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느냐?”며 ‘본말전도’ 현상을 꼬집는다.

1950~1960년대 초반 궁핍했던 추상 화가들은 동네 식료품점이나 주류 판매점에서 돈 대신 그림으로 물건을 구입하기도 했다. 그랬던 작품들이 수십 년 뒤 한 점 당 수백만달러에 팔려나갔고, 위작 유통이라는 블랙 마켓이 형성됐다. 중국 선전에서는 가짜 그림 스튜디오가 지금도 성업 중이다.

중국 선전의 가짜그림 공장. /넷플릭스 '당신의 눈을 속이다: 세기의 미술품 위조사건'

예술이 돈이 될 때 벌어지는 이상한 일들은 이 뿐 아니다. 상류층의 편법 상속과 비자금 창구로 변질된 건 해 묵은 얘기. 요즘 예술은 ‘메타버스(meta+universe·초현실)’ 영역까지 진출해 ‘창조 경제’를 구현하고 있다.

이달 초 뱅크시의 판화 작품 ‘Morons(멍청이들)’ 판본 500여 개 중 하나가 ‘디지털 파일’로 원본 가격의 4배인 38만달러(약 4억3000만원)에 팔렸다. NFT(non fungible token·대체 불가능 토큰)라는 ‘원본’ 보증 기술을 적용한 ‘디지털 파일’을 가상 화폐 이더리움을 받고 팔았다고 한다. 지난 11일 크리스티 경매에서도 디지털 아티스트 ‘비플’의 NFT 작품이 6900만달러(약 780억원)에 판매됐다.

'Burnt Banksy'(불탄 뱅크시)라는 이름의 유튜브 계정을 통해 3월 4일 공개된 뱅크시의 그림 ‘멍청이’가 불타는 장면이다. 이 그림은 파괴됐지만 판매를 위해 가상으로 옮겨진 이미지는 경매에서 고가에 낙찰됐다. /유튜브 캡처

누구나 복사·붙여넣기 할 수 있는 인터넷 공개 콘텐츠에 ‘신기술’로 소유권을 박제했을 뿐인데, 수십억~수백억원이 우습게 오간다. 3년 전쯤부터는 피카소 4만분의 1 조각, 이우환 300분의 1 조각 등 미술품을 가상 화폐로 분할 구입하고, 작품 대신 소유권 보증서를 받는 이들도 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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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보기] 피카소 1/40000 조각, 이우환 1/300 조각····그림 공동 소유하는 2030

미국 영화 감독 알렉스 라미레즈 말리스는 얼마 전 자신의 방귀 소리 1년치 분량을 NFT 경매에 내놓으며 기묘한 광풍을 꼬집었다. 말리스와 함께 방귀 소리를 팔고 있는 예술가 그레이슨 얼은 “NFT를 구입하면 마치 당신이 혁명가라도 된 듯 기술적 참신함을 갖춘 느낌을 받겠지만, (NFT는) 기존의 낡은 예술 시장과 똑같은 방식으로 운영될 뿐”이라고 비판했다.

개요 다큐멘터리 l 캐나다 l 90분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특징 ‘예술’은 모르겠고, 베끼는 ‘기술’은 역시 중국이 甲

⭐평점 IMDb 7.0/10 🍅로튼토마토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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