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진포 셔우드 홀 문화 공간'. 로제타 홀 선교사가 한국행을 결심하게 만든 메리 라이언의 말 "아무도 가려 하지 않는 곳에 가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김한수 기자

지난 9~10일 개신교 연합 기관인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대표회장 김정석 목사) 주최로 강원 지역 기독교 근대 문화유산 탐방을 다녀왔습니다. 춘천을 시작으로 고성 화진포, 양양, 강릉, 원주를 순례하는 코스였습니다.

강원도 개신교 역사를 배울 수 있는 귀한 기회였습니다. 강원도는 일반적으로 휴양, 피서 등 ‘쉬러 가는 곳’으로 알려진 지역이지요.

'화진포 셔우드 홀 문화 공간' 전경. /김한수 기자

화진포에서 홀 선교사 가족을 기념하는 ‘화진포 셔우드 홀 문화 공간’을 만난 것도 이곳이 휴양지였던 덕분입니다. 셔우드 홀(1893~1991) 선교사 가족은 2대에 걸쳐 한국을 위해 헌신한 의료 선교사 가족입니다. 그의 부모인 윌리엄 제임스 홀(1860~1894)-로제타 홀(1865~1951) 부부는 미국·캐나다 출신의 의사 커플로 한국에 선교사로 왔습니다. 평양 선교를 맡게 된 부부는 한 살 된 아들을 데리고 갔는데, 당시 주민들이 서양 아기를 신기하게 여기고 구경하러 오는 것을 선교에 활용해 일정한 시간을 정해 아기를 보여주는 ‘구경 선교’라는 방법을 도입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곧이어 발발한 청일전쟁 와중에 평양에서 부상병 등을 돌보다 남편은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홀로 남은 아내는 한국을 떠나지 않고 여성 환자와 의료 교육에 평생을 헌신했고 아들인 셔우드 홀 역시 의사가 돼 한국 최초로 ‘크리스마스 실’을 보급하는 등 결핵 퇴치에 앞장섰습니다. 그리고 2대는 서울 양화진 묘원에서 잠들어 있습니다.

김정석 한교총 대표회장이 '화진포 셔우드 홀 문화공간'에서 홀 선교사 가족의 헌신과 희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한수 기자

그런데 이런 사연은 알고 있지만 화진포와의 인연은 몰랐습니다. 알고 보니 일반적으로 ‘김일성 별장’으로 알려진 ‘화진포의 성(城)’이 아들 셔우드 홀 선교사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고 하네요. 1930년대까지 선교사들의 여름 휴양지는 원산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1937년 일제는 원산에 비행장을 만든다며 선교사들의 휴양지를 철거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안으로 구한 곳이 화진포였고, 당시 휴양지 이전을 담당한 것이 셔우드 홀이었다고 합니다. 셔우드 홀은 독일인 건축가에게 의뢰해 언덕 위에 2층짜리 돌집을 짓고 ‘화진포 성(The Castle of Wha Chin Po)’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금강산이 보이고 호수는 스위스의 루체른 호수 같다며 좋아했던 곳이지만 홀 선교사는 1940년엔 한국을 떠나게 되지요. 일제가 스파이 혐의로 추방했기 때문이지요.

선교사 휴양소로 시작된 광복과 함께 운명이 바뀝니다. 이 지역이 38선 이북이 되면서 소련군과 김일성의 별장으로 쓰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때 붙은 별칭 ‘김일성 별장’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죠.

'화진포 셔우드 홀 문화 공간' 내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를 기리는 전시물. /김한수 기자

‘셔우드 홀 문화 공간’은 작년 6월 문을 열었는데, 그 이전까지는 생태박물관으로 쓰인 건물이라고 합니다. 실내는 1층엔 어머니, 2층엔 아들의 업적을 위주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1층엔 폭 17㎝짜리 종이 34장을 이어 붙여 샌프란시스코에서 서울에 이르는 여행기를 정리한 ‘두루마리 편지’를 비롯해 김점동 소녀를 최초의 한국인 여의사 ‘박에스더’(남편 성을 따르고 영어 이름을 붙여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합니다)로 키워낸 일, 여성 환자를 치료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 맹아를 위해 점자를 개발하고 장애인 여성을 위해 평양여맹학교를 연 이야기 등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전시장에는 윌리엄 제임스 홀의 묘비 뒤로 “나의 세월은 마치 동화 같았습니다. 값진 황금 같은 순간들이었습니다”라는 윌리엄 제임스 홀의 글이 벽에 비치고 있었습니다. 관람객들이 전시 내용에 몰입할 수 있는 전시 기법이 훌륭했습니다.

첫날 일정을 함께한 김정석 한교총 대표회장은 “부상병을 돌보다 아버지가 순교한 곳에 아들이 돌아와 ‘크리스마스 씰’을 만들어 결핵 퇴치에 앞장선 사실은 감동적”이라며 “홀 선교사 가족은 그 당시 소외되고 억눌린 사람들과 여성들에게 자유, 평등, 인권을 선물한 역사를 만들었다”고 기렸습니다.

'화진포 셔우드 홀 문화 공간'에 전시된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 /김한수 기자

그런데 자료들이 어디선가 본 듯했습니다. 설명판을 자세히 보니 전시품은 복제품이라고 합니다. 원본은 서울 양화진의 100주년기념교회에 소장돼 있다고 하네요. 사실 양화진 문화원에선 홀 가족에 대해 이처럼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워낙 많은 선교사 가족의 자료가 전시돼 있으니까요. 그런데 화진포에는 홀 일가족의 업적에만 집중하니 훨씬 몰입도가 높아지는 것 같았습니다. 루프톱(옥상)에 올라보니 한쪽엔 석호(潟湖), 다른 쪽엔 파도치는 해수욕장이 둘 다 보였습니다. 저 멀리 서쪽으로는 흰 눈이 녹지 않은 백두대간 산맥이 꿈틀거리는 풍경이 보였습니다. 요즘 말로 ‘풍경 맛집’이었습니다. 이 문화 공간은 고성군이 운영한다고 합니다. 이제는 이곳이 ‘김일성 별장’이 아니라 ‘홀 선교사 가족’으로 더 유명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번 탐방을 안내한 한국기독교역사문화아카데미 연구위원 홍승표 목사는 “강원도는 거리로는 가깝지만 선교 역사에서는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선교가 늦었던 지역”이라고 말했습니다. 홍 목사는 강원도 동해 출신이었는데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히 느껴지는 분이었습니다. ‘등잔 밑’이라고 한 것은 서울에서 직선 거리가 가까운 것에 비해 선교가 늦었다는 말이었습니다. 저희가 이번에 탐방한 지역은 감리교 선교 지역이었습니다. 한국에 온 서양 선교사들은 무분별한 경쟁 대신 선교 지역을 나눠 맡음으로써 효율을 택했습니다. 1909년경 확정된 선교 지역에 따르면 강원도 북부는 남감리교, 원주 등 강원도 남부는 북감리교가 맡았습니다.

문제는 강원도는 산지가 많고 인구도 적어 선교 우선순위에서 밀렸다는 점입니다. 특히 선교사들에게 태백산맥을 넘는 일은 무척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저희 일행이 춘천을 출발해 양구·인제를 지나 진부령을 넘을 때에도 멀미가 날 정도로 꼬불꼬불한 길에 함박눈까지 날렸습니다. 100년 전 선교사들에겐 이 길이 얼마나 험한 장애물이었을까요. 이런 이유로 영동 지역은 강원도 내에서도 더욱 선교 순위에서 밀렸겠지요. 그런저런 이유로 1896년 한국에 도착해 뒤늦게 선교에 나선 남감리교가 이 지역을 맡게 되었다고 합니다.

1910년경 선교사들이 교단별로 선교 구역을 분할한 지도. /한교총 제공

여기 지도가 한 장 있습니다. 1910년 무렵 선교사들이 선교 구역을 색깔로 구분한 것입니다. 한반도의 허리쯤에 굵은 활자가 보입니다. ‘철원’입니다. 철원은 교통의 요지로 선교사들 입장에서도 중요한 곳이었던 모양입니다. 그 오른쪽 위로 원산과 원산해변이 나오고 그 아래로는 ‘다이아몬드 마운틴’ 즉 금강산이 적혀 있지만 거기서부터 남쪽으론 동해안을 따라 ‘부산진’까지 아무런 지명이 적혀 있지 않습니다. 영서 지역엔 ‘춘천’과 ‘원주’만 적혀 있습니다.

앞서 ‘원산 휴양지’ 말씀을 드렸는데요. 강원 동해안 지역의 선교는 서울에서 원산을 통해 ‘기역자 루트’로 이뤄졌답니다. 대관령을 넘는 것보다는 비교적 평탄한 원산까지 육로로 간 후 거기부터는 배를 타고 고성, 양양, 강릉으로 내려왔다는 거지요. 바로 그 루트를 따라 ‘원산 대부흥’의 주역인 하디 선교사가 배를 타고 내려오며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강원 양양군 현북면 기사문리 '만세고개'에 당시 만세운동을 기리는 조형물이 서있다. /김한수 기자

‘기역자 형’ 선교 루트는 뉴스의 전달 루트이기도 했습니다. 직선이 아니라 우회해서 오는 만큼 시간이 더 걸렸겠지요. 그래서 강원 동해안 지역에선 1919년 만세운동이 주로 3월이 아닌 4월초에 벌어졌습니다. 그렇지만 ‘결기’는 그 어떤 지역 못지않았다고 하지요. 양양 현북면 기사문리에는 ‘만세고개’가 있습니다. 1919년 4월초 만세운동을 벌이다 9명이 순국하고 2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과거 춘천중앙교회 예배당으로 쓰이다 현재는 춘천미술관(아래)과 봄내극장으로 변신한 건물들. /김한수 기자

서양 선교사들의 접근이 쉽지 않았던 만큼 한국인 조력자들의 활약이 컸던 지역이 강원도이기도 합니다. 춘천의 경우, 1898년 서울 광희문교회 성도였던 나봉식-정동열이 파송돼 첫 예배를 드렸고, 미국인 로버트 무스 선교사에 이어 이덕수 전도사가 춘천에 와서 초가 예배당을 마련하면서 춘천중앙교회가 시작됐습니다. 이덕수 전도사는 항상 지게에 성경과 찬송가를 지고 다녀서 ‘조선의 바울’ ‘지게 전도사’라는 별칭을 얻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춘천 중심 봉의산 자락에는 한때 예배당으로 썼던 예수교병원터(현 춘천미술관)와 1960년대 말에 건축한 일명 ‘우주선 예배당’(현 봄내극장)이 각각 미술관과 복합 문화 공간으로 쓰임새를 바꿔 이어지고 있습니다.

원주 서미감병원(현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구내 모리스 선교사 사택. 1910년대 건물로는 유일하게 남은 건물로서 현재는 사료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김한수 기자

원주에서는 ‘서미감 병원’을 배웠습니다. 스웨덴의 ‘서(瑞)’, 미국의 ‘미(美)’, 감리교의 ‘감(監)’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이름입니다. 1913년 문을 연 이 병원은 미국에 이민 온 스웨덴 출신 감리교인들이 일부 기금을 헌금했다는 뜻에서 영어로는 ‘스웨덴 감리병원(The Swedish Methodist Hospital)’이라고 불렀답니다. 이 병원은 1933년 재정 악화 등의 문제가 겹쳐 문을 닫았다가 광복 후 원주기독병원을 거쳐 현재의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으로 이어졌습니다. 병원 구내에는 적벽돌로 된 양관(洋館), 즉 모리스 선교사 사택이 남아 있습니다. 현재는 의료사료관으로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의 역사를 보존 전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