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지난주에 이어 한교총이 발간한 선교사 전기 시리즈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한국의 중심은 대전”...목원대 설립한 스톡스 선교사
대전 목원대를 설립한 감리교 선교사 찰스 스톡스(1915~1998)의 태도도 인상적입니다. 그는 왜 서울이 아닌 대전에 대학을 설립했는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더군요.
“6·25동란 이후 목회자들이 납북되고 피해가 많았고 이후 여러 지역에서 교회를 세우겠다고 나섰으나 지도자가 없었어요. 감리교회 지도자 양성을 마음먹었어요. 그런데 한국인은 서울에서만 공부하기 좋아하고 농촌에선 일을 하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한국의 중심부인 대전에 농촌에서 일하고자 원하고 남을 섬기는 감리교 지도자 선교사 교육 사업가들을 육성하고픈 마음이 생겨났지요.”
‘한국의 중심부인 대전’ ‘농촌에서 일하고자 원하고 남을 섬기는 지도자’라는 표현이 눈에 띄더군요. 요즘으로 치면 지방 분권, 지방 균형 발전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설립 초기부터 대학에선 신학 외에도 농촌 계몽 활동을 위해 다양한 실업 교육, 즉 젖소와 염소를 키우는 낙농업, 과수원예농업, 양봉업 교육을 했지요. 농촌 주민과 농촌 교회의 자립을 함께 염두에 둔 것입니다.
찰스 스톡스는 ‘한국 선교사 집안’ 출신입니다. 1907년 아버지 메리온 보이드 스톡스 선교사가 미국 남감리회 선교사로 한국에 온 것이 시작이지요. 찰스의 형 3명은 개성, 원산에서 태어났고 찰스는 부모가 안식년으로 귀국함에 따라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외가에서 태어났지요. 이후 부모를 따라 한국에 와 서울외국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애즈베리 대학을 나왔지요. 한국 선교사로 오는 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1940년 7월 한국 선교사로 왔다가 10월에 일본의 압박으로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인 1947년 다시 한국에 와 6·25전쟁 와중에는 충북 음성에서 전쟁고아를 돌보는 향애원을 설립하고, 1953년부터 대전을 거점 삼아 전후 복구를 돕고 복음 사역을 시작한 분이지요.
“한국 선교를 위해선 언어, 관습, 사람의 언덕을 넘어야 한다”
한국 침례교 개척자인 말콤 펜윅(1863~1935)은 “한국 선교를 위해 넘어야 할 세 가지 언덕이 있다. ‘언어의 언덕’ ‘관습의 언덕’ ‘사람의 언덕’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모든 선교사가 넘었던 언덕이 아닐까 싶습니다.
광주광역시 오웬기념각으로 남은 의사 선교사 오웬
의사였던 클레멘트 오웬(1867~1909) 선교사는 지금도 광주광역시에 ‘오웬기념각’으로 남아 있는 분이지요. 1912년 완공됐으니 벌써 114년이나 된 오웬기념각은 지금도 주요 종교 문화 행사를 개최할 수 있는 ‘현역 문화 공간’입니다. 오웬은 원래 목포에서 사역했는데 그의 진료소를 찾는 이들이 교인이 돼 교회가 급성장 부흥했다고 하지요. 이후 광주에 목회자가 필요하게 되자 오웬은 목포를 떠나 광주로 옮겨 의사 역할보다는 목사로 활동했는데 급성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의 사망은 한센인 시설인 여수 애양원 설립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런 사연입니다. 그가 급성 폐렴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은 또 다른 의사 선교사 포사이드가 급히 목포에서 광주로 오는 길에 한센병 여인을 만납니다. 포사이드는 그녀를 말에 태워 광주로 데리고 와서 돌보았지요. 그렇지만 결국 2주 만에 그녀도 사망합니다. 그냥 그렇게 끝낼 수도 있는 일이었지요. 그렇지만 포사이드와 선교사들은 아무도 거두지 않는 한센인들을 돌보기로 합니다. 광주 선교부에 병원과 구호소를 열자 소문을 들은 전국의 한센인들이 모여들었고 주민들과 마찰이 일어났지요. 선교사들은 당시로서는 인적이 드물던 여수에 한센인 시설을 만들기로 합니다. 애양원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애양원은 먼 훗날 ‘사랑의 원자탄’으로 잘 알려진 6·25 순교자 손양원(1902~1950) 목사로 이어지지요.
홀 선교사 부부 수행하다 평양 감영 갇혀 구타당한 김창식 목사
한국인 김창식(1857~1929) 목사는 서양 선교사들의 믿음직한 동반자였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1894년 ‘평양 기독교인 박해 사건’의 주인공이기도 하지요. 평양은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 이후 서양인과 개신교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1894년 홀 박사 부부와 함께 평양에 전도 여행을 온 김창식은 5월 10일 새벽 평양감사가 보낸 관헌에 체포돼 심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평양감사는 10만 냥을 내놓지 않으면 계속 때리겠다고 했고요. 이 사건은 금세 외교 문제로 비화했습니다. 홀 박사 부부는 서울의 영국 영사관과 미국 공사관에 전보를 쳤고, 양국 외교관은 조선 왕실에 항의하며 석방하라고 압력을 넣었지요. 결국 조선 왕실은 평양감사를 질책하는 전문을 보냈고 김창식은 5월 11일 오후 6시쯤 석방됐습니다.
영국과 미국 공사관은 관련자 처벌과 배상을 요구했고 조선 측은 결국 영국과 미국 공사관에 500달러를 배상했다고 합니다. 당시 평양감사는 민병석이라는 명성황후의 친척이었답니다. 명성황후의 뒷배를 믿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다지요. 결국 민병석은 이 사건 때문에 자리에서 쫓겨났답니다.
이 사건은 48시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벌어진 일종의 해프닝이었지만 개신교 선교와 관련해 중요한 결과로 연결됐습니다. 평양 주민들 눈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던 평양감사보다 개신교 선교사들이 더 힘이 센 것으로 보이지 않았을까요. 이후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불릴 정도로 개신교가 부흥한 도시가 됐습니다.
한국인 최초의 장로교 목사 7인 중 한 명인 길선주(1868~1935) 목사의 마지막 기도는 이렇습니다.
“저를 평안하게 놓아 주옵소서. 그러나 병석에서 죽지 아니하고 죽는 날까지 주의 말씀을 전하며 강단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게 하소서. 주님께 영광 되게 하소서.”
6개월 만에 사망한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조카들도 한국 선교
헨리 데이비스(1856~1890) 선교사는 호주 장로교 출신 최초의 선교사입니다. 그런데 1889년 10월 한국에 와서 6개월 만인 1890년 4월 폐렴으로 사망했습니다. 서울을 떠나 선교지인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숨졌습니다. 무언가 업적을 남길 수가 없는 조건이었지요. 그렇지만 그는 한 알의 밀알이었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 호주 선교사들이 잇따라 한국 특히 부산과 경남 지역으로 찾아왔고, 20년 후에는 조카 마가릿과 진 자매가 부산, 진주를 찾아왔습니다. 조카들은 20~30년간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다 귀국했지요. 자매 중 동생인 진은 멜버른대 의대에 시신을 기증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데이비스는 우리의 어둠 속에 들어와 우리의 집을 방문하였고, 우리의 병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어둠의 땅에서 씨앗으로 뿌려졌고, 한국을 위한 큰 빛과 생명으로 자랐습니다.”
데이비스 선교사를 매장할 때 돕던 한 한국인은 이런 회고를 남겼다고 합니다.
선교사 전기 시리즈는 이들 외에도 ‘섬마을 선교의 어머니 순교자 문준경’(6권) ‘남부 신사 윌리엄 전킨’(9권) ‘한국에 뿌리 내린 유화례 선교사의 선교와 삶’(11권) ‘최초의 한글 성경 번역자 존 로스’(12권) ‘한국 오순절의 초석을 놓은 메리 럼시’(14권) ‘한국 초기 기독교 의료 선교사 스크랜턴’(15권) ‘알렌, 한국 교회의 둥지를 만들다’(17권) ‘호주 선교사 헨리 데이비스’(18권) ‘제임스 게일과 함께한 마지막 식사’(19권) ‘오순절 신앙으로 한국 복음화의 구심점이 된 체스넛 선교사’(20권) ‘복음을 따라 한국을 섬기다:선교사 호머 헐버트’(21권)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근대 선교사라고 하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만 알려진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한국 개신교 140년 역사엔 이렇게 많은 분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음을 새삼 일깨워 주는 전기 시리즈입니다. 선교사 전기 시리즈는 비매품이지만 한국교회총연합 홈페이지(https://www.ucck.org/InfoMap/Series)에서 전자책 형태로 무료로 읽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