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을 일소(一笑)에 부치고, 무엇이든 반드시 될 수 있다고 말하라. (Laughs at impossibilities and says it shall be done)”
나폴레옹의 좌우명이 아닙니다. 장로교 첫 선교사로 한국에 온 언더우드(1859~1916) 집안의 가훈(家訓)이라고 합니다.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인 언더우드는 아버지에게 늘 이 말을 듣고 자랐고, 자신의 아들에게도 해주었다고 합니다.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남들의 말을 웃어넘기거라. 그리고 우리는 무엇이든 반드시 이루어낼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하거라.”
영국 출신인 언더우드 집안은 가문의 문장(紋章)이 있었다고 하네요. 그 문장에는 십자가와 함께 발톱을 드러낸 사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사자처럼 용감하게 불가능을 헤치고 나가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한국 교회 선교사 전기 시리즈’ 제1권 ‘개척자 언더우드’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개신교계 대표적 연합기관인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이 지난 2022년부터 문화체육관광부 지원을 받아 펴내고 있는 ‘한국 교회 선교사 전기 시리즈’가 최근 21권까지 출간됐습니다.
처음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앞에는 대부분 불가능한 일들이 놓여 있었겠지요. ‘언더우드’편 저자 이혜원 연세대 연구교수는 ‘유불선 이교도의 나라에 기독교를 전파하고, 유일신 개념을 이해시키고, 소학교도 없는 나라에 대학을 설립하고, 대학도 없는 나라에 신학을 교육하겠다는 것, 왕정의 나라에 천부인권을 깨닫게 하고, 전국 방방곡곡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고 적었습니다. 맞습니다. 그렇지만 언더우드를 비롯한 선교사들은 그 불가능을 극복하고 이 땅에 근대문명을 선물했지요.
시리즈 1권은 언더우드, 2권은 아펜젤러입니다. 각각 장로교, 감리교 최초의 선교사이지요.
아펜젤러 “한국인을 믿는 것이 외국인의 의무”
아펜젤러(1858~1902)에 대해서도 많이 알려지지 않은 편지와 설교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세워 신학문을 가르쳤지요. 이런 편지가 있더군요.“우리는 주님께서 이 학생들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믿는다. 변화된 학생들은 주의 권능을 부여 받아 백성에게 선한 것을 베풀게 될 것이다. 교육은 세속적인 사역이지만 우리는 그 안에 복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육은 선교 사역의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사역에 충성을 다하면 엄청난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1887년 7월 25일 편지 일부)
즉, 아펜젤러에게 교육이란 단순히 신학문을 가르치는 것 이상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부여 받아 백성에게 선한 것을 베풀게 하는 과정으로 여겼습니다.
한편, 아펜젤러의 한국인에 대한 태도는 ‘믿음’입니다. 그는 ‘독립문 정초식’ 연설에서 “한국인을 믿는 것이 외국인의 의무다”라고 말했다지요. 한참 후까지도 서양 사람들은 한국인을 잘 믿지 않았습니다. 불신하고 무시하는 일도 많았지요. 그렇지만 첫 선교사였던 아펜젤러는 “한국인을 믿는 것이 외국인의 의무”라고 강조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아펜젤러가 세운 정동제일교회에서는 한국 최초의 서양식 결혼식이 열렸지요. 각각 배우자와 사별한 남녀의 재혼이었습니다. 아펜젤러의 주례로 결혼식을 마친 하객들은 케이크와 아이스크림을 먹고 차를 마시면서 피로연을 열었다고 하지요. 선교사들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모두 이 땅에 신문물을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아펜젤러 전기의 뒤에는 부록으로 배재학당역사박물관이 소장한 아펜젤러 사진첩 20여 장이 수록돼 있습니다. 아펜젤러가 직접 촬영한 사진도 많은데요, 그가 도착할 무렵의 제물포항 모습부터 다양한 풍속과 현재 정동제일교회 문화재 예배당으로 쓰이는 벧엘예배당 완공 후 모습 등입니다. 청일전쟁 직후 폐허화된 평양 거리 모습도 있고, 김헬런(김활란) 어린이가 예배 맨 앞줄에 앉아 있는 모습 사진도 있습니다.
언더우드, 아펜젤러가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진 것과 달리 3권부터는 일반적으로는 잘 모를 수 있는 이름들이 등장합니다. 이들 역시 우리가 그 은혜를 기억해야 할 인물들입니다.
6개월 만에 한국어로 설교한 ‘어학 천재’ 레이놀즈
3권 윌리엄 레이놀즈(1867~1951)는 성경 번역의 대가입니다. 그는 거의 ‘어학 천재’였다고 하네요. 고교, 대학, 대학원 시절 라틴어, 헬라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에 탁월한 성취를 보였고 3년 과정 신학교는 2년 만에 마칠 정도로 탁월했답니다. 신학교 재학 시절 히브리어는 100점 만점을 받았고요. 원래 고전문학 교수를 지망했을 정도였지요. 그는 한국어도 빨리 익혀 6개월 만에 노방 전도에 나서고 한국어로 설교하고 일기와 메모에도 한글로 고유명사를 적었답니다. 외국어를 6개월 배워서 연설하고 일기를 쓴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겪어본 사람은 알지요. 게다가 당시 한국어에 대해서는 사전 지식도 없었을 테니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현장 목회에도 능력을 발휘해 남장로교 선교사임에도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설립한 서울의 승동교회, 연동교회 담임목사를 맡았지요. 연동교회에선 17개월 만에 떠나는 그에게 교인들이 비단에 찬하문(攢賀文)을 적어 선물했다고 하지요.
전기 시리즈를 읽다 보면, 19세기 말 한국은 선교사에 관해서는 참으로 복 받은 나라라는 생각이 듭니다. 윌리엄 레이놀즈가 어학의 천재라고 말씀드렸는데 호남 지역 선교의 개척자인 유진 벨 역시 1891년 센트럴 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했습니다. 19세기 후반 미국에서는 개신교 선교 열풍이 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교사 지망생은 중국, 일본, 인도 등을 희망했습니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존재도 잘 몰랐지요. 그럼에도 이렇게 탁월한 인재들이 한국으로 파송됐다는 것은 다른 나라와 달리 한국에서 개신교가 부흥할 수 있는 토대가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남대 세운 인돈의 당부 “수업은 정시에 시작하고 마쳐야”
한남대를 세운 윌리엄 린튼(인돈·1891~1960)은 건강이 악화돼 1960년 학장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떠나며 다섯 가지를 당부했다고 합니다.
<1. 정시에 수업을 시작한다. 2. 정시에 수업을 마친다. 3. 모든 수업에서 모든 학생에게 숙제를 준다. 4. 모든 수업에 교수와 학생이 출석한다. 5. 기독교적인 분위기>
일견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런데 학교 설립자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이런 사항을 당부했다는 것은 역으로 생각하면 이런 기본이 잘 지켜지지 않았다는 뜻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