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이랑 대를 심고 다섯 이랑 채소 갈고 한나절은 좌선하고 한나절은 글을 읽고-갑자 하지절 불일암에서’
한글을 세로로 써 내려간 아래엔 찻주전자와 찻잔이 그려져 있다. 법정 스님이 갑자년(1984) 하지에 쓴 글이다. 여름을 앞둔 송광사 불일암의 한적한 풍경이 생생하다.
법정 스님은 생전에 붓글씨로 선시(禪詩)를 적고 그림을 그리고 ‘붓장난’이라고 했다. 또 제자와 신도와 지인들에게 붓글씨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정식으로 서예를 배우진 않았지만 스님만의 독특한 ‘법정체(體)’를 보여주는 글씨들이다.
법정 스님의 입적 16주기(3월 11일)를 앞두고 스님의 붓글씨 작품 100여 점을 모은 ‘우리 곁에 법정 스님, 붓장난’ 전시가 19일 개막해 3월 21일까지 열린다. 전시장은 길상사 바로 건너편 ‘스페이스 수퍼노말’.
먼저, 스님이 ‘붓장난’이라 이름 붙인 선묵(禪墨) 작품들. 스님은 “물을 움켜 뜨니 달이 손안에 있고 꽃을 만지니 향기가 옷깃에 스미네. 옛 선사의 노래. 오늘 우리들은 얼마나 건조한 정서 속에 살고 있는지를 되돌아보게 하네. 먹이 남아서 붓장난했네”라고 적었다. 이 작품을 비롯해 몇몇 작품엔 산중 초막에서 지내는 삶의 간소함과 여유로움을 담백하게 노래했다. 덕조 스님은 “문자 그대로 편지를 쓰다가 먹이 남았을 때 그리고 쓴 작품들”이라고 했다.
법정 스님은 찻주전자와 찻잔 그림을 본인의 시그니처로 삼은 듯하다. 화면 아래에 찻주전자와 찻잔을 그려 넣고 나머지 여백에 글을 쓴 작품도 여럿 나온다. 여러 편 나온 ‘홀로 마신 즉 그 맛과 향기가 신기롭네’라는 글이 대표적.
법정 스님의 번역으로 유명한 ‘숫타니파타’의 구절을 인용한 듯한 글귀도 보인다. ‘홀로 행하고 게으르지 않고 비난과 칭찬에도 흔들리지 않고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남에게 이끌리지 않고 남을 이끄는 사람.’
대중에게는 냉랭하게 보였던 법정 스님의 따뜻한 인간적인 면도 느낄 수 있다. 봉은사 다래헌과 송광사 불일암에서 신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책과 차(茶)를 보내준 데 대한 고마움을 표하고, 어린 자녀를 키우며 교사 생활을 하는 신도를 격려하고, 감기 조심을 당부하는 자상한 모습도 보인다. “나도 모질지만 추위란 놈도 모질군. 봄이 기다려지네” “멀리 이민이라도 간 줄 알았어요. 하도 감감 소식이기로” “또 약 먹을 시간이네. 여덟 시 반이군” “어느 때고 불쑥 나타나게”라고 적기도 했다. 연하장에선 “새해에는 없는 듯이 들어앉아 선현들의 말씀이나 읽으면서 살고 싶소”라고 새해 소망을 밝히기도 했다.
이해인 수녀에게는 종교는 다르지만 수도자로서의 공통점에 대해 이야기한다. ‘고독’이다. 법정 스님은 “수도자에게 있어서 고독은 그림자 같은 것”이라며 “배부른 상태에서는 고독을 느끼지 못합니다. 주린 자만이 고독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고독을 배우십시다”라고 적었다.
‘삼국지’나 ‘서유기’를 읽으며 소일하는 모습도 보인다. 법정 스님의 붓글씨는 세로쓰기일 때는 흘림체로 종이 전체를 화선지 삼아 그림처럼 흘러간다. 아래아(ㆍ)를 조형 요소로 활용하고, 먹이 점점 옅어지다가 다시 진해지는 모습에서 편지 한 통을 쓰면서 서너 번 붓을 먹에 찍어 써내려간 법정 스님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편지지에 가로로 쓴 편지는 같은 사람이 쓴 글씨가 맞는지 싶을 정도로 필체가 달라 보이기도 한다.
전시장 2층 불일암 상량문(1975년)도 처음 공개되는 자료. 불일암 건축을 도운 분들 이름이 적혀 있는데 장욱진 화백, 디자이너 앙드레김, 비구니 불필 스님의 이름도 보인다.
붓글씨 작품과 함께 덕조 스님이 가까이에서 촬영한 법정 스님의 모습도 볼 수 있다. 불일암, 길상사, 강원도 오두막 그리고 병실에서 항암 치료받으면서도 기도하는 모습도 있다. 작년 10월 ‘예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빠삐용 의자’도 불일암에서 무진동차로 옮겨와 전시하고 있다.
전시를 준비한 길상사 주지 덕조 스님은 “이번 전시와 책(도록)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은사 스님의 ‘무소유’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고자 하는 작은 기도이자 감사의 마음”이라고 말했다. 길상사는 앞으로 경내에 ‘무소유 문학관’을 만들어 이번 전시작 등 법정 스님 작품을 소장-전시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