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1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에서 열린 제야의 종 타종 행사 모습./뉴스1

오늘(31일) 밤 12시 서울 보신각에서는 ‘제야의 종’ 타종식이 열립니다.

‘제야(除夜)’는 섣달 그믐날 밤을 가리키지요. 양력이긴 하지만 한 해의 마지막, 그리고 새해의 첫 날을 기념하는 타종(打鐘) 행사입니다. 자정이 가까워지면 ‘10, 9, 8, 7, 6, 5, 4, 3, 2, 1’ 카운트다운을 외치다 정각 자정이 되는 순간을 종을 울리면 주변에 모인 시민들이 환호성을 올리지요. 뉴욕 타임스퀘어의 카운트다운처럼 보신각 타종은 한국의 새해맞이를 상징하는 풍경 중 하나입니다. 같은 시각 서울 조계사와 명동성당에서도 새해를 기념하는 종소리가 울립니다.

보신각종은 원래 조선 세조 때 주조해 원각사에 있던 종인데, 보신각으로 옮겼다고 하지요. 원래 종은 보물 2호로 지정돼 국립중앙박물관에 있고요, 현재 보신각에 걸려 있는 종은 1985년 성덕대왕신종 일명 에밀레종을 복제했다고 합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종은 사찰의 범종이 모델이 된 것이죠.

보신각 신년 타종을 앞두고 평소 궁금하게 여겼던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종(鐘) 이야기입니다. 동양종과 서양종의 차이점 이야기이지요. 동양종과 서양종은 모양이나 크기, 설치 위치 등 모든 면이 다르지요. 그중 큰 차이점은 타종법입니다. 동양종은 겉면을 울려서 소리를 내는 반면 서양종은 줄을 당겨 전체를 흔들어서 안에 있는 추가 종 안쪽을 때리면서 소리를 내지요. 소설이나 영화, 뮤지컬로 잘 알려진 ‘노트르담 드 파리’의 콰지모토가 줄에 매달려 종을 울리는 장면을 상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인공지능 ‘제미나이’에게 동양종과 서양종의 차이에 대해 물어봤습니다. 순식간에 설명이 좍 펼쳐졌습니다.

2025년 9월 24일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열린 에밀레종(성덕대왕 신종) 타음(打音) 조사 공개회. 2003년을 마지막으로 공개 타종을 멈췄던 종이 22년 만에 소리를 내고 있다. /김동환 기자

우선 이름부터 동양종은 범종(梵鍾), 서양종은 벨(bell)로 부르지요. 범종은 아래 입구 쪽이 조금 오므라드는 ‘항아리형’, 서양종은 입구가 점점 넓어지는 ‘나팔형’이고요. 타종 방식 역시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동양종은 나무 막대(당목)로 종 겉면의 정해진 지점(당좌)을 때리는데, 입구가 오므라들었기 때문에 소리가 바로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내부를 회전하며 은은히 울려 퍼집니다. 반면 서양종은 입구가 바깥으로 퍼져 있기 때문에 소리가 바로 종 밖으로 나가 멀리 퍼지는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동양종은 종각에 매달려 바닥에 가까이 설치되는 반면 서양종은 높은 종탑에 걸립니다. 동양종은 수행의 방편으로 쓰이고, 서양종은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빠르게 소식을 전하는 용도로 쓰였다고 합니다.

서울 봉은사에서 펴내는 월간지 ‘판전(板殿)’ 12월호가 도착해 펼쳐봤습니다. 마침 불교학자 목경찬 선생의 ‘범종 소리에 담긴 여러 이야기’라는 글이 실려 있더군요. 이 글에 따르면 사찰에서는 아침저녁 예불 때 범종을 울리는데 타종 횟수는 사찰에 따라 다르다고 합니다. 아침에 28번, 저녁에 33번 울리는 절도 있고, 저녁에 36번 치는 절, 정오에 12번 치는 절도 있다고 하지요. 그런데 타종 횟수는 각각 달라도 의미는 비슷하다고 합니다. 모든 중생이 범종 소리를 듣고 윤회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하는 뜻이라고 하지요. 동양종이 수행의 방편으로 쓰인다는 것은 이런 뜻이겠지요.

국보 제36호인 오대산 상원사 동종. /조선일보DB

다큐멘터리 등으로 보는 에밀레종의 소리는 문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고 아름다운 울림을 주지요. 에밀레종만큼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사찰 취재를 가면 새벽이나 저녁 예불 시간에 범종 소리를 듣게 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새벽 예불 때 듣는 범종 소리는 언제나 감동적입니다. 깜깜하고 고요한 새벽, 스님 한 분이 나와 목탁을 치며 경내를 돌며 도량석을 합니다. 이어서 스님들이 나와 범종각에 올라 범종, 법고(法鼓·북), 목어(木魚), 운판(雲版)을 순서대로 울립니다. 가장 소리가 두껍고 무거운 종으로부터 시작해 점차 금속판의 날카로운 소리로 옮겨가는 것이지요. 깜짝 놀라지 않도록 서서히 세상을 깨우는 것입니다. 이런 사물(四物)을 울리는 동안 사찰의 대중 스님들은 처소에서 줄지어 나와 법당에 모여 새벽 예불을 시작합니다. 캄캄한 사찰 경내에 조명이 하나씩 켜지면서 종과 북, 목어와 운판을 차례로 비추고 거기서 소리가 울려 퍼지는 새벽 풍경은 장엄합니다.

인공지능에 동양종과 서양종의 지역 분포를 물어보았습니다. 대답은 불교와 기독교의 영향권을 따라 나뉘는데 중간에 ‘종(鐘)이 없는’ 거대한 지대가 있다고 합니다. 바로 이슬람권입니다. 이슬람권에서는 사람이 목소리로 예배 시간을 알리지요. 그래서 중동과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권은 종의 동서양을 가르는 거대한 완충 지대라는 것이죠.

또 동구권 정교회 종은 타종법이 동서양이 혼합되고 절충된 형태라고도 알려주네요. 즉 정교회 계통은 종 자체는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돼 있고 내부의 추만 흔들어 종의 안쪽 면을 때리는 방식이라고 합니다. 종교에 따른 종의 차이도 흥미로웠습니다.

성공회 강화성당의 종각과 범종. /성공회 강화성당

‘동양종=불교’ ‘서양종=기독교’ 등식이 항상 적용되는 것도 아닙니다. 한국에는 동양종이 설치된 서양 종교 시설도 있거든요. 바로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입니다. 강화성당은 아름다운 한옥 건물로 잘 알려져 있지요. 성공회가 한국 문화 속에 스며든 토착화의 상징으로 유명합니다. 이 성당 마당에는 불교 사찰에서 볼 법한 종각과 범종이 있습니다. 원래 이 성당에는 1914년 영국 성공회에서 기증한 서양식 종이 있었는데 1944년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가 징발해 버리는 바람에 40여 년간 종이 없는 상태로 지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989년 신자들의 정성을 모아 현재의 범종을 봉헌했다고 합니다. 종을 새로 만들면서 서양종이 아니라 성공회의 토착화 정신을 이어 한옥과 잘 어울리는 동양식 범종으로 만든 것이죠. 겉면엔 요한복음 구절을 새겼고요. 이 범종은 지금도 한겨울을 제외한 부활절부터 11월 15일 성당 축성 기념일까지는 매주 주일 성찬례 때 33번 울리고 있답니다.

앞서 인공지능은 동양종은 ‘명상용’, 서양종은 ‘신호용’이라고 알려줬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서양종 역시 듣는 입장에 따라 영혼을 맑게 해주니까요.

밀레의 유명한 회화 작품 ‘만종’을 보고 있으면 그림 속에서 종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요. 들판에서 하던 일을 멈추고 두 손 모아 기도하는 부부의 모습에선 종소리가 단지 기도 시간을 알려주는 기능을 넘어서 평온함을 선물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지난 2019년 3월 대전 대흥동성당에서 조정형 할아버지가 있는 힘껏 줄을 당겨 종을 치는 모습. /신현종 기자

종에 대해 말씀드리다 보니 지난 2019년 3월 대전 대흥동성당 ‘종지기 할아버지’를 만난 기억이 납니다. 당시 50년 동안 대흥동성당 종을 쳤던 할아버지가 은퇴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뵈었는데요. 조정형 할아버지라는 분이었습니다. 당시 73세였으니 20대부터 종을 쳤던 것이죠. 보통 성당이나 교회의 종은 바깥에서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종탑 안에 설치돼 있기 때문이죠. 대흥동성당은 종탑까지 120계단이나 있더군요. 제가 갔을 때 할아버지는 오전 11시 50분쯤 종탑에 올라 라디오를 켜고 기도를 올렸습니다. 이윽고 라디오에서 12시 시보가 울리자 할아버지는 줄에 매달려 온몸의 체중을 실어 당겼습니다. 작은 종, 중간 종, 큰 종을 차례로 세 번씩 울리고 큰 종은 스무 번 더 울렸습니다. 줄에 매달려 쪼그려 앉았다가 위로 솟구치기를 반복했지요.

조 할아버지는 1969년부터 대흥동성당 구내 사택에 살면서 종을 쳤는데 평일엔 정오와 오후 7시, 주일엔 오전 10시, 정오, 오후 7시 종을 울렸습니다. 종 치는 시간을 맞추느라 1박 2일 여행도 못 다녔다고 했습니다. 한번은 주변에서 “대신 쳐 줄 테니 걱정 말고 다녀오라”고 강권해 할아버지 부부가 12일간 이스라엘 등으로 성지순례를 다녀온 적이 있다고 합니다. 순례를 다녀왔더니 “종소리가 달라졌다”며 성당에 민원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종 치는 ‘손맛’이 다른 것을 사람들이 알아챈 것이겠지요. 또한 듣는 이들에게 할아버지의 종소리는 단순한 ‘신호’ 이상의 의미였던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동화 ‘강아지똥’으로 유명한 작가 권정생 선생도 경북 안동의 한 교회에서 종지기로 생활하며 아름다운 동화를 썼다고 하지요. 종을 친다는 것, 종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기도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동양종, 서양종이 함께 울리며 밝아오는 새해를 기뻐하는 날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