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남쪽의 작은 섬 동검도에 7평짜리 아름다운 채플을 만들어 현대인에게 영성의 공간을 제공하는 조광호 신부. /조광호 신부 제공

35년 된 반바지를 입는 천주교 사제가 있다. 원래 긴바지였는데 해지고 낡아 잘라서 반바지로 만들었다. 손수 재봉틀 돌려 깁고, 천을 덧대고 바느질했더니 성철 스님 누더기 장삼 비슷해졌다. 검약 때문만은 아니다. 오랜 시간을 함께했기에 이 반바지는 동반자다. “결국, 모든 만남은 신비다. 물질과 만남이 이토록 신비롭다면 하물며 사람과의 만남은 얼마나 경이로운가.”

조광호 신부가 35년 동안 입은 바지(왼쪽)과 동검도 채플. /조광호 신부 페이스북

인천 강화도 남쪽 작은 섬, 동검도에 7평짜리 작은 채플을 짓고 사는 조광호(78) 신부의 이야기다.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으로 유명한 그가 산문집 ‘동검도 채플 블루 로고스’(파람북)로 독자를 만난다.

조 신부는 서울가톨릭대 신학부를 나와 독일 뉘른베르크 조형예술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영성(靈性)’이란 단어조차 드물던 1999년 문화영성 잡지 ‘들숨날숨’을 창간하는 등 문화예술과 영성의 만남을 추구해왔다. 이번 책에는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밑줄 칠 만한 잠언 같은 문장이 그득하다. 동검도 바닷가에서 건져 올린 묵상이다.

동검도 채플에서 조광호 신부가 묵상하고 있다. 정면 유리창을 통해 십자고상과 갯벌, 마니산 정상이 보인다. /사진=김한수 기자

“느림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숨 가쁘게 달리는 사회 속에서 종교는 인간에게 ‘멈춤’을 선물해야 한다.” “신앙은 서두르지 않는다. 기도는 언제나 기다림 속에 있고, 사랑은 언제나 인내 속에 있다.” “청빈의 출발은 감사다. 이미 주어진 것들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마음. 존재 자체가 은총임을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움켜쥐려 하지 않는다.” “할 수 있다는 것과 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같은 뜻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상처받은 존재다. 동시에 누군가를 상처 입힌 불완전한 인간들이다. 서로를 용서할 때, 비로소 우리는 다시 인간다움을 회복한다.” “당신이 용서하는 순간, 풀려나는 것은 상대가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이다.” “관상(觀想·말과 생각을 넘어 하느님 안에 머무는 기도) 없는 봉사는 쉽게 지치고, 봉사 없는 관상은 공허하다. 두 길이 만나야 온전한 영성이 된다.”…

말기 암 환자와 나눈 이야기에선 묵직한 울림이 느껴진다. 의사는 환자에게 6개월, 길면 2년이 남아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그 환자는 조 신부에게 “시간의 길이는 중요하지 않다. 참으로 소중한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오늘’”이라고 했다. 조 신부는 “우리는 늘 미래를 향해 눈을 두느라 오늘을 흘려보낸다. 그러나 그에게는 내일이란 개념이 무의미했다. 그에게 주어진 것은 언제나 오늘뿐이었고, 그것이야말로 삶의 전부였다”고 적었다.

조광호 신부의 산문집 '동검도 채플 블루 로고스' 표지. /파람북

AI 시대, 종교는 사람들에게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조 신부는 “무조건 ‘믿어라’가 아니라 ‘함께 찾아보자’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종교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 있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영혼을 흔드는 만남을 찾고 있다”는 것. 종교의 목적은 본래 사람을 영적으로 성장시키고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인데, 본질은 바뀌지 않고 접근하는 방식이 바뀌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당은 사막 한복판에 있는 오아시스 같은 곳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책에는 ‘고통’에 관한 사색이 많다. 그는 “설명되어 버린 고통은 진짜 고통이 아니다. 그래서 교회는 고통을 ‘신비’라 부른다”며 “예수는 고통에 대해 철학적 논문을 쓰지 않았다. 그분은 설명하지 않고 함께 울었다”고 적었다. 조 신부는 서문에서 “잠시 지나는 이 고된 삶의 기항지에서 만나서 그냥 반갑고 고마운 당신과 함께 나누는 정담의 귓속말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