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위에서 석양이 지는 고갯마루를 볼 때면 ‘저 너머에 고향이 있는데…’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태어난 곳이 대구임에는 틀림없지만 고향으로서 대구에 대한 추억은 별로 없다.>
2004년 출간된 회고록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첫머리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김 추기경은 대구 남산동에서 태어났지요. 어릴 적 선산(구미)을 거쳐 군위로 이사해서 살았지요. 선산에서 군위로 이사할 때 넘었던 큰 고개 쪽으로 해가 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저 너머에 고향이 있는데…’라고 한 것은 선산을 그리워하는 마음이겠지요. 김 추기경이 태어난 곳은 대구·경북 지방이지만 김 추기경 집안은 이 지역 토박이가 아닙니다. 김 추기경 집안은 충청도 출신입니다. 이 회고록에서 김 추기경은 집안 이야기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충청도 순교자 집안 출신
<우리 집안은 조부 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본관이 광산(光山)인 조부 보현(요한) 공은 독실한 신자로 1868년 무진박해 때 충남 연산에서 체포돼 서울에서 순교하셨다. 그 바람에 아버지(김영석 요셉)는 피난길에서 태어나셨다. 아버지는 당시 박해를 피해 다니던 신자들이 그랬듯이 옹기장수로 전전하다 대구 처녀인 어머니(서중학 마르티나)와 결혼해 대구에 정착하게 되었다.>
김 추기경 회고록 중 이 부분은 짧지만 많은 역사적 사실을 함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우선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김 추기경 집안은 대대로 경상도에서 살았던 것이 아니라 충청도 출신의 순교자, 구(舊) 교우(敎友) 가정 출신이라는 점입니다. 또한 천주교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고향을 떠나 전국을 떠돌았고, 이때 생계를 이어간 방법은 옹기장수였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고향을 떠나 깊은 산중에 숨어 살면서 시골장을 떠돌며 옹기와 숯을 파는 생활, 당연히 가난이 따라다녔지요.
김 추기경은 회고록에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추측컨대 선산에서도 셋방살이를 했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 집은 왜 이렇게 가난한가’, ‘다른 집 애들은 점심을 먹는데 난 왜 굶어야 하는가’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가난을 뼈저리게 느꼈을 텐데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신기할 따름이다.”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옹기’ 즉 항아리와 초기 천주교 신자들의 관계를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을 생각하면 아마도 많은 분이 ‘바보’라는 단어를 떠올릴 겁니다. 2007년 직접 그린 자화상 아래에 ‘바보야’라고 적은 그림이 유명하지요. 겸손한 표현이었지요. 이 ‘바보’에서 출발해 김 추기경을 기리는 재단이 생겼는데요, 그 이름이 ‘바보의 나눔’이지요.
김 추기경이 스스로에게 붙인 또 다른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오늘 말씀드릴 ‘옹기’입니다.
김 추기경은 생전에 ‘옹기’라는 아호를 썼습니다. 김 추기경의 부친은 그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아마도 김 추기경은 부친이 옹기를 파는 모습을 직접 보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김 추기경은 자신이 옹기장수의 아들이었다는 점을 잊지 않았고, 옹기가 초기 박해 시대 천주교 신자들의 정체성과 연결된다는 점을 잘 알았기 때문에 자신의 아호를 ‘옹기’로 정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기념하는 장학회 이름이 ‘옹기장학회’입니다. 김 추기경 생전인 2002년 설립된 옹기장학회는 장차 통일 이후 북한 선교에 나설 사제를 양성하기 위해 만들어졌지요. 올해까지 511명이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박해 시절, 숨어 살던 신자들을 살린 옹기
김 추기경이 아호를 옹기로 쓸 만큼 옹기는 초기 천주교인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상징이었습니다. 군위의 ‘김수환 추기경 사랑과 나눔 공원’엔 곳곳에 옹기가 놓여 있고, ‘옹기동’이라는 건물도 있습니다. 전주의 치명자산 성지에는 ‘옹기가마경당’도 있습니다. 옹기가마 모양으로 경당을 만든 것이지요. 그 옛날 선조들이 옹기가마 안에서 모임을 갖고 미사를 드렸던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마치 로마 시대 신자들이 지하 무덤 카타콤베에서 모임을 갖고 미사를 드렸듯이 옹기가마 경당은 한국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풍경이며 옹기와 천주교의 관계 역시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일입니다.
왜 옹기였을까요? 한국적 특수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신앙 때문에 쫓기는 사람들에게 옹기는 여러모로 유용한 도구였습니다.
우선 옹기는 우리 민족에게는 생활 필수품이었습니다. 청자, 백자처럼 비싼 도자기는 왕족이나 귀족 등 특권층만 사용했습니다. 그렇지만 간장, 된장, 김장김치를 담가 먹으려면 신분 귀천을 떠나 누구나 항아리가 필요했습니다. 또 자본이나 땅이 없어도 만들 수 있다는 점도 도망자 천주교인들에겐 유리한 조건이었습니다. 깊은 산중에 옹기가마와 숯가마를 만들어 옹기와 숯을 구워 내다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며 장터를 왕래하며 박해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었고요. 그렇게 깊은 산속에 옹기가마와 숯가마를 중심으로 교우촌이라는 신앙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혹독한 박해 가운데도 신앙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이죠.
앞서 김수환 추기경의 조상은 충청도 연산, 지금의 논산 지역 출신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한국 천주교의 못자리는 충남의 내포 지역이지요. 내포 지역은 지금의 아산, 당진, 서산, 예산, 홍성, 태안 등 충남 서남 지역입니다. 김대건 신부의 고향인 당진 솔뫼를 비롯해 초기 신자 대부분 이 지역 출신입니다. 여기서부터 신자들이 생겨나 전국으로 확산했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을 한국 천주교의 ‘못자리’라고 부르고, 순교자가 많이 나왔다고 해서 ‘묫자리’라고도 부릅니다.
김대건 신부의 가족도 그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경기 안성 지금의 미리내 성지로 이주했지요. 지금은 아름다운 성당과 성지로 유명한 강원 횡성의 풍수원, 원주의 용소막, 충북 제천의 배론성지와 진천 배티성지 등은 이렇게 박해를 피해 숨어든 천주교 신자들의 교우촌에서 시작됐습니다. 배론성지는 행정구역으로는 충북 제천인데 천주교 교구로는 원주교구에 속해 있습니다. 용소막성당과 자동차로 20분 거리이고요. 도(道) 경계에 걸쳐 있지요. 배티성지는 행정구역으로는 충북 진천에 있어서 청주교구에 속하지만 고개 하나만 넘으면 경기 안성입니다.
이처럼 초기 천주교 교우촌들은 관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깊은 산중에 있으면서도 도(道) 경계에 걸쳐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들을 추적해 오는 사람들은 찾아오기 어렵지만 자신들은 언제든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 용이한, 자기들 나름의 ‘교통의 요지’를 찾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원래 천주교 신자 중에 옹기 기술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지, 박해를 피해 산으로 숨다가 옹기장이를 만나 기술을 배운 것인지 선후(先後)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박해시대라는 파도를 넘는 과정에서 옹기 기술은 천주교 신자들에겐 없어서는 안 될 절대적인 기술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옹기장이는 사실상 천민이었다고 합니다.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지주나 양반은 노비 문서를 태우고 노비들을 해방시킨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해방된 노비들은 “여기가 천국”이라며 신자가 됐다고 하지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평등 사상을 가진 분들이었으니 스스로 천민이 돼서 숯을 굽고 옹기를 구워도 신앙을 지킬 수만 있다면 견딜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 같네요.
옹기에 십자가, 물고기 문양 그려 넣기도
당시 천주교 신자 옹기장이들이 만든 옹기에는 십자가나 물고기 문양 등을 새겼다고 합니다. 마치 로마의 박해 시대에 신자들이 물고기 문양을 그림으로써 서로를 알아봤다고 하는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언제 박해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옹기 겉면에 십자가와 물고기 문양을 그리고 있는 신자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게 됩니다.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이런 모진 박해는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돼 선교의 자유가 선포되면서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렇지만 신앙을 지키기 위해 이미 고향을 떠나 옹기장이로 생계를 꾸리고 있던 천주교 신자들은 가난한 가운데 신앙을 이어가게 됐지요. 그런 전통이 김수환 추기경의 아버지까지 이어졌고요. 그래서 김 추기경은 그런 전통을 잊지 않고 자신의 아호를 ‘옹기’로 지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전국 곳곳에 천주교 신자와 옹기의 전설이 어린 곳이 남아 있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전북 김제 부거리, 경기 부천 여월동, 강원 속초 중도문 등이죠. 김제 부거리에는 실제 옹기가마가 보존돼 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습니다. 안내판에는 부창마을이 박해를 피해 이주해 온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만들어진 마을이라고 적고 있지요. 부천 여월동에는 1866년 병인박해를 피해 이주해 온 천주교인들이 만든 가마터가 있었다고 하지요. 부천시립박물관은 그 가마터 위에 지었다고 합니다. 또 속초 도문동의 옹기마을은 충청도 청주에서 박해를 피해 이곳 동해안까지 설악산 입구까지 이주한 천주교 신자들이 옹기를 구우면서 만든 마을이라고 합니다. 이제는 이름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최근 속초 설악동 입구의 옹기마을을 찾아봤는데요. 경로당 이름에만 ‘옹기마을’이 남아 있더군요.
김 추기경이 스스로 ‘옹기’라고 아호를 쓴 것은 여러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옹기장이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이 우선이겠지요. 한편으로는 소박하지만 누구에게나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인 항아리 같은 삶을 지향한 것은 아닐까요. “서로 밥이 되어 주십시오”라고 했던 그의 당부도 같은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마음가짐을 가진 지도자와 신자들 덕분에 한국 천주교의 오늘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옹기 자체가 사라져 가는 시대, 전래 초기 천주교와 김수환 추기경 그리고 옹기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