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한 주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올해도 이제 한 달이 채 남지 않았습니다. 올해도 종교계 거인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늘은 그분들이 남긴 말씀을 정리하며 한 해를 정리해 볼까 합니다.
지난 4월 21일(현지 시각)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善終)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종교에 대한 무관심이 확산하고 유럽에서는 가톨릭 교세가 약화되던 시기에 교황이 됐지요. 제 느낌으로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개인기’(?)로 가톨릭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특히 ‘이중 턱’을 보여주며 환하게 웃는 미소는 그의 트레이드마크 같았지요.
실제로 그는 기쁨, 특히 ‘복음의 기쁨’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슬픔 안에는 거룩함이 없다.” “슬픈 성인은 그저 보잘것없는 성인일 뿐”이라고도 했습니다. “성인과 성녀들은 결코 우울한 얼굴을 하지 않으셨다. 고통 중에서도 평화로운 얼굴이셨다. 예수님도 수난 중에,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오히려 평화로운 얼굴로 다른 이들을 걱정하셨다”고 했지요.
그는 어떻게 항상 기뻐하며 웃을 수 있었을까요. 그는 회고록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최악의 모욕엔 귀를 막고 있다. 나에 대해 말하고 쓰인 모든 것을 들여다본다면, 매주 심리학자의 상담을 받아야 할 테니까요.”
사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취임 때부터 온갖 공격을 받았지요. ‘좌파’ 심지어 ‘공산주의자’라는 비난까지요. 중도 사임설도 돌았고, 마피아의 암살 기도설까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프란치스코 교황이 꿋꿋이 버티면서 항상 웃음을 잃지 않았던 것은 이처럼 자신을 향한 비난을 무시할 수 있는 담대함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정당한 비판을 무시한다면 ‘독선’이겠지요. 그렇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이 독선자가 아니었음은 누구나 알고 있지요.
한편으로 그를 지탱해준 버팀목 중의 하나는 ‘가난한 이’에 대한 사랑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는 항상 가난과 가난한 사람을 잊지 않았습니다. 가난을 피해 이탈리아에서 아르헨티나로 이민 온 가정에서 태어난 자신의 배경을 잊지 않았고요. 그의 가족은 집에서는 이탈리아어 대신 스페인어만 쓰도록 했답니다. 자녀와 후손이 이탈리아어로 상징 되는 가난에서 벗어나 아르헨티나 사회에 하루라도 빨리 진입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겠지요. 그럼에도 교황은 회고록 첫머리에 조상들이 제노바를 출발해 아르헨티나로 이민 온 이야기를 썼습니다. 그것도 그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뱃삯을 구하지 못해 원래 타려던 배를 놓쳤는데, 바로 그 배가 침몰해 300명이 목숨을 잃은 이야기입니다. 조부모의 운명이 바뀔 수도 있었고 자신은 세상에 없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지요. 그는 그렇게 가난한 이를 잊지 않았습니다.
교황 취임 후 첫 방문지가 이탈리아 남부 항구 도시 람페두사였지요. 가난한 아프리카 사람들이 지중해를 건너 유럽으로 밀입국하는 거점이었습니다. 사고로 많은 이가 숨진 곳이기도 하고요. 교황은 이 상징적인 곳을 가장 먼저 찾았던 것입니다. 바티칸에서 노숙인들에게 식사를 나눴고, 그들의 발을 씻어 주었습니다.
‘세계 가난한 이의 날’도 제정했습니다. 역대 교황은 자신이 특별한 관심을 두는 분야에 대해 기념일을 제정하곤 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2년 ‘세계 병자(病者)의 날’을 제정했지요.
프란치스코 교황이 콘클라베에서 차기 교황으로 선출됐을 때 한 추기경이 그에게 말했다지요. “가난한 사람들을 잊지 마세요.”
비단 그 때문만은 아니겠으나 그는 재임 기간 내내 가난한 사람들을 잊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가난한 이를 돌보라’고 말만 하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지요. 그는 솔선수범했습니다. 바티칸의 교황 거처를 마다하고 회의 참석을 위해 세계의 고위 성직자들이 묵는 숙소 ‘성녀 마르타의 집’에서 선종할 때까지 11년 동안 지냈습니다.
그는 선종 후에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에 묻힐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생전에 미리 자신이 묻힐 곳도 지정했지요. 평소 가장 의지했던 성모를 기념하는 성당, 성모대성전(산타마리아레조레)입니다. 그는 회고록에서 “바티칸은 내가 마지막 봉사하는 집, 영원한 안식처는 성모 대성전”이라고 했습니다. 흔히 중책을 맡는 사람들은 ‘봉사한다’고 하지요. 그렇지만 봉사, 헌신이라는 표현은 권력 행사와 동일시되곤 합니다. 그런 점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진정한 봉사와 헌신을 택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일터와 안식처를 구분한 것이지요.
마지막 입원에서도 ‘극비’에 속하는 자신의 건강 상태를 투명하게 공개하라고 했던 것도 성직자와 세속 권력자는 건강 상태에 대한 공개 여부부터 달라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아닐까요.
그의 묘비엔 라틴어로 간단히 ‘Franciscus(프란치스쿠스)’라고만 적었습니다. 좋아하는 성경 구절 등을 적을 수도 있었겠지만, 왠지 프란치스코 교황답다는 생각입니다. 그 이름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각각 프랑스와 아일랜드 출신으로 한국에서 헌신하다 생을 마친 분들도 기억납니다. 지난 4월 선종한 초대 안동교구장 두봉 주교와 지난 6월 선종한 천노엘 신부입니다.
두봉 주교는 파리외방전교회 출신, 즉 프랑스 출신입니다. 파리외방전교회 사제들은 선교지에 나갈 때 가족과 고별 인사를 나눈다고 합니다. 귀국할 생각이 없는 것이지요. 예수회 같은 다른 가톨릭 선교회가 군대처럼 이동하면서 전진하는 것과 달리 파리외방전교회 사제들은 선교지에서 뼈를 묻는다는 각오로 부임한다고 합니다. 물론 두봉 주교가 한국에 올 때는 박해 시대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각오는 똑같았습니다. 그는 평생 안동교구를 위해 헌신하다가 이곳에서 잠들었습니다. 선종하시기 몇 개월 전에 뵌 적이 있습니다. 당시 사고로 고관절이 골절됐지만 그는 계속 웃었습니다. 그리고 감사를 이야기했습니다. 그가 남긴 한마디는 “기쁘고 떳떳하게”였습니다. 안동교구장 시절 교구 사제들과 함께 정한 다짐입니다. 두봉 주교도 “기쁘게”를 강조했습니다. 그는 “남을 행복하게 해주려 하면 최고의 행복을 누리게 된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천노엘 신부는 아일랜드 성골롬반회 출신이었습니다. 두봉 주교가 섬세한 성격이었다면 천노엘 신부는 ‘아일랜드 사나이’ 느낌이었습니다. 아일랜드 출신 사제들을 몇 분 만나 뵈었는데 공통적인 느낌은 ‘사나이’였습니다. 거친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뚫고 나가는 개척 정신이 대단했습니다. 천 신부님도 그랬습니다. 1979년 그가 봉사하던 한 시설에서 무연고 발달장애인 여성이 숨진 것을 계기로 그의 무덤에 “사회를 용서하시렵니까”라는 묘비명을 새긴 후 발달장애인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습니다. 1980년대 국내에서는 발달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빈약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선입견을 뚫고 생애를 돕는 무지개공동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룹 홈과 일터까지 만들었지요. 그가 손수 몰던 프라이드 승용차를 함께 탄 기억이 잊히지 않습니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아지자 고향 아일랜드로 귀국해 거기서 선종했습니다. 그렇지만 유언에 따라 유해의 일부는 그가 평생을 헌신해온 광주광역시에 모셨습니다.
지난 9월 22일 별세한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총회장)을 지낸 신경하 목사님도 기억에 남습니다. 아현감리교회 담임목사 시절 감독회장에 선출된 그는 소박한 목회자였습니다. 평생 ‘집 한 칸 없는 목회자’였던 그는 감독회장 4년 임기를 마친 후 고향 강화도로 낙향했습니다. 그리고는 조용히 지내셨지요. 그러던 지난 9월 별세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죽음이었지만 그는 모두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연명 치료는 거부한다는 의향서를 미리 작성해 두었고, 시신은 연세대 의과대학에 기증한다는 서약서를 작성해 두었습니다. 빈소는 마련하지 말고 장례 예배는 한 번만 해달라고 당부했습니다. 장례 예배는 어떤 분들이 어떤 순서로 진행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도 다 메모해 두었습니다. 심지어 장례 예배 후 조문객들에겐 식사는 어떻게 대접하고 어떻게 감사 인사를 해야 할지까지 다 미리 생각하고 당부해 두었습니다. 평소 성격다운 깔끔하고 아름다운 마무리였습니다.
그는 수술을 앞둔 밤 휴대폰 메모장에 남긴 글에서 이렇게 생을 정리했습니다.
“내게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오늘의 삶을 더 충실히 보람 있게 살기 위한 다짐이자 매 순간을 아름답게 만드는 과정이었다. 오늘까지 살아온 나의 85년의 세월은 하나님이 함께하신 은총의 세월이었다.”
앞서 말씀드린 프란치스코 교황도 “오늘이 바로 감동의 선물입니다. ‘오늘’ ‘지금’이라는 때는 바로 구원의 때입니다. 오늘이 바로 구원과 은총의 결정적인 순간인 것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결국 ‘오늘’ ‘지금’입니다. 올해를 정리하며 이 한마디를 기억하면 어떨까요. ‘오늘 당장 기쁘고 떳떳하게’. 그리고 ‘쓸데없는 댓글이나 험담엔 귀 막고 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