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성내교회 전경. 제주 성 바로 안쪽에 자리 잡은 이 교회의 네 번째 예배당으로 1974년 지어졌다. / 김한수 기자

“설러블라 설러블라 경허지 않으면 야가기 끄너 블켜(그만두라 그렇지 않으면 목을 베어 놓겠다).”

1908년 선교를 위해 제주도에 도착한 이기풍(1865~1942) 목사를 맞은 것은 이런 살해 위협과 돌팔매였다. 제주도는 접근도 쉽지 않았지만 토속 신앙 뿌리가 깊었다. 1885년 언더우드·아펜젤러의 내한 이후 20년이 넘도록 개신교 선교가 이뤄지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이 목사는 굴하지 않았다. 조랑말 타고 섬 전역을 돌며 헌신적으로 일손을 돕고 환자를 기도로 낫게 하는 일이 벌어지자 사람들은 차츰 마음을 열었다.

한국 장로교 역사상 처음으로 제주도 선교에 나섰던 이기풍 목사. 이 목사는 1908~1915년, 1927~1931년 성내교회 목사를 역임했다. /조선일보DB

베이스캠프는 성내교회. 서울을 오가며 이미 개신교 신앙을 접한 주민 김재원의 도움으로 1908년 2월 8일 향교골 김행권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예배를 드린 것이 시작이었다. 1년 만에 주일 예배에 20명이 출석하게 됐고 1910년경에는 마침 제주도에 유배와 있던 개화파 거두 박영효의 도움으로 옛 훈련청 터를 사들여 예배당을 갖추게 된다. 제주성(城) 바로 안쪽의 요지로 큰길 건너편은 제주목 관아였다. 성내교회 마당 안쪽 제주노회가 1948년 세운 이기풍 목사와 김재원 장로 공적비는 제주 선교의 뿌리가 이곳임을 보여주고 있다.

제주 성내교회 마당에 세워진 이기풍 목사와 김재원 장로 공적비 앞에서 이 교회 강연홍 담임목사가 설명하고 있다. /김한수 기자

이 목사의 제주 선교는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을 위한, 한국인의 선교’라는 의미를 갖는다. 1907년 평양대부흥 이후 한국 장로교는 독립된 지역 조직 즉 독노회(獨老會)를 설립한다. 독노회는 마침 그해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인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은 7명 중 한 명을 제주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정했다. 선교 비용도 외국 선교사가 아닌 한국인들이 맡았다.

제주 성내교회 강대상 제주 선교 개척자인 이기풍 목사 때부터 사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한수 기자

제주에서 돌팔매를 맞은 이 목사는 한때 외국인 선교사에게 돌을 던지며 전도를 방해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회심 후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전인미답의 제주 선교를 자원했다. 1910년에는 남녀소학교를 여는 등 이기풍 목사가 열정적으로 전도한 덕분에 3년 만에 제주도에는 예배당 3곳, 예배처소 2곳에 교인 160명으로 교세가 성장할 수 있었다. 사경회(査經會·성경 공부 특별 기도회)와 부흥회도 이어졌다. 그러나 과로한 탓일까. 이 목사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병을 얻게 돼 1915년 교회를 사임한다. 그러나 그가 뿌린 신앙의 씨앗은 헛되지 않았다. 후임 최대진 목사가 부임한 1915년 연말 성탄 축하 행사에는 교인과 학생까지 모두 3000명이 참석해 화제가 됐다. 1917년에는 성내교회가 당회(堂會)를 갖춘 조직교회로 발돋움하게 된다. 교회 입구엔 당시 당회록 서문이 필기체 그대로 동판에 새겨져 있어 그날의 감격을 전하고 있다.

제주 성내교회 입구에 설치된 당회록 서문 동판. 1917년 4월 당회가 조직된 감격을 보여준다. /김한수 기자

선교 역사는 짧았지만 제주 개신교계는 3·1운동과 독립운동에 핵심 역할을 했다. 이기풍 목사를 도왔던 조봉호 전도사를 중심으로 김창국·윤식명·임정찬 목사 등이 앞장서 제주도민 4000여 명으로부터 1만원을 모금해 상해임시정부로 보내기 직전 발각되는 바람에 세 목사가 제주도를 떠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어려움 속에서도 교회는 자리를 잡아갔다. 1923년엔 목조 예배당을 짓고 1924년엔 제주 최초의 유치원도 열었다. 1930년에는 제주도 내 17개 교회로 전남노회에서 독립해 제주노회가 설립됐다. 노회 출범 후 개신교계는 금주·금연, 물산장려 등 생활 개선을 위한 청년면려회 운동도 주도했다.

광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나환자의 어머니’로 불린 미국 여선교사 서서평도 여름휴가철이면 제주를 찾아 여성 성경 공부 모임을 지도하는 한편 공중위생·유아 양육법도 가르쳤다. 여성 성경 모임에는 물질을 마친 해녀들도 참여했다. 성내교회는 이후 교인이 늘어남에 따라 여러 교회를 분립하는 등 제주도의 모(母)교회로서 역할을 해왔다.

제주 성내교회 입구에 설치된 '최초의 성내교회 터' 표석에 대해 강정길 원로장로가 설명하고 있다. 제주도가 세운 이 표석엔 "제주도 개신교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성내교회 터"라고 적혀 있다. /김한수 기자

현재 성내교회는 주일예배에 400명이 출석하는 규모.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역사가 깊은 교회 신자라는 자부심이 강해 “어떤 경우에도 떨어져 나가지 않을(?) 교인들”이라는 게 강 목사의 설명. 이 교회 100년사를 편찬한 강정길 원로장로는 이기풍 선교사의 제주 선교 100주년을 기념해 지난 2007년 임진각에서 제주까지 800㎞를 1개월에 걸쳐 도보 순례하고 ‘갈 길을 밝혀주시니’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이런 열정이 성내교회 117년 역사를 지탱해왔다. 강 목사는 “선교의 은혜로 세워진 교회라는 점을 자랑으로 여기며 해외 선교에 힘쓰고 있다”며 “저도 내년 정년 이후 해외 선교사로 나가기 위해 외국어 공부 등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제주=김한수 종교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