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동구 초량교회의 전경. 초량교회는 1892년 선교사 윌리엄 베어드가 설립한 부산 최초의 교회이며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한강 이남 최초의 교회다./김동환 기자

KTX 부산역을 나서면 맞은편으로 가파른 언덕을 따라 빽빽한 작은 건물과 좁은 골목길이 꼬불꼬불 얽혀 있는 초량동 풍경이 펼쳐진다. 6·25 전쟁 당시 전국에서 자유를 찾아 몰려든 피란민들이 산비탈에 판잣집을 짓고 살았던 곳. 지금 이 언덕길은 ‘이바구(경상도 사투리로 ‘이야기’란 뜻)길’로 지정돼 벽화와 168계단, 비탈길 엘리베이터 등 명물로 방문객을 맞고 있다. 한국 근현대사가 지층(地層)처럼 축적된 ‘이바구길’ 초입에 133년 역사의 초량교회가 자리 잡고 있다.

부산 초량교회 역사관 입구에 '옛날을 기억하라'는 신명기 구절이 적혀 있다. 역사관에는 올해 5월까지 1500명이 방문할 정도로 관심이 뜨겁다. /김한수 기자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오,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 초량교회 역사관 입구에는 구약 신명기 구절이 적혀 있다. 교회의 역사와 한국 근현대의 중요한 이야기를 배울 수 있는 현장이다. 지난 10일 대구의 한 교회에서 찾아온 방문객 10여 명에게 교회의 역사를 안내하던 초량교회 역사위원장 정충권 장로는 “올해만 벌써 1500여 명이 다녀갔다”고 말했다.

부산 초량교회를 설립한 미국 북장로교 소속 베어드 선교사(왼쪽)와 1895년 무렵 한문서당 학생들.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이 베어드 선교사이며 앉은 여성은 부인 애니 베어드 선교사. /초량교회

초량교회는 1892년 미국 북장로교 윌리엄 베어드(1862~1931·한국명 배위량) 선교사가 설립했다. 베어드는 초량교회를 전진기지 삼아 이곳에서 전도지를 인쇄해 영남 지역에서 순회 전도하며 대구제일교회 등을 세웠고 훗날 평양에 숭실학당을 세우는 등 한국의 복음화와 근대화에 애쓰다 1931년 장티푸스에 걸려 순직했다. 베어드는 1894년 1살 된 딸 낸시 로즈를 이곳 부산에서 병으로 잃고 외인묘지에 안장했다. 베어드의 아내 애니가 이런 개인적 아픔을 찬송시로 담은 찬송가 ‘멀리 멀리 갔더니’(387장)는 지금도 불리고 있다. 베어드의 뒤를 이어 매카이, 애덤슨, 매킨지, 어빈 선교사 등이 파송돼 초량교회와 병원에서 헌신했다. 어빈(한국명 어을빈) 의료선교사는 18년간 ‘전킨병원’에서 활동하며 매년 1만명에 가까운 환자를 진료했고 1909년 한센병원을 설립하고 유치원을 지원하고 젊은이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했다. 그는 특히 제약 기술이 뛰어나 ‘만병수(萬病水)’ 등 50여 종의 약을 생산·판매했는데 일본, 대만까지 수출했다고 한다.

초량교회의 헌신은 1922년 이 교회가 새 예배당을 지을 때 신자가 아닌 주민들까지 성금을 낼 정도로 지역사회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초량교회는 이 예배당을 지으면서 ‘초량삼일교회(草梁三一敎會)’로 이름을 바꾸기도 했다. 일제가 ‘3·1운동’과의 연관성을 의심했지만 ‘삼위일체’라고 둘러댔다고 한다.

부산 초량교회 역사관에 전시된 주기철 목사가 사용하던 강대상.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순교한 주기철 목사는 초량교회 3대 담임목사를 지냈다. /김한수 기자

초량교회는 일제강점기 신사 참배 거부 운동의 요람이었다.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 순교한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주기철(1897~1944) 목사를 비롯해 이약신(1898~1957)·한상동(1901~1976) 목사가 이 교회 담임목사를 지냈고, 방계성(1888~1950) 장로, 조수옥(1914~2002) 전도부인 등 신사 참배 거부 운동의 주역들도 초량교회 출신이다.

부산 초량교회에서 1950년 8월말~9월초 열렸던 구국기도회 참석자들. 2주에 걸친 기도회에서는 목회자와 장로들의 회개가 이어졌다. /초량교회

6·25전쟁 당시 초량교회는 구국 기도회로 널리 알려졌다. 당시 초량교회는 목회자 250여 명이 피란하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온 개신교 피란민들이 모여 눈물의 기도를 드리는 ‘의(義)의 피란처’였다. 교회는 마당과 유치원 등 모든 공간에 천막을 치고 피란민을 수용했고 교인들이 반지와 예물을 팔아 이들에게 주먹밥 등 먹을 것을 제공했다. 구국 기도회가 열린 것은 1950년 8월 말. 낙동강까지 전선이 밀리며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 위기였을 때였다. 절체절명의 순간, 참석자들은 하나님께 무엇을 달라고 청하기 전에 회개부터 했다. 목회자들이 먼저 신사 참배를 거부하지 못했던 자신의 치부를 털어놓았다. 이어 광복 후 교권 다툼 등을 통회하는 릴레이 기도가 이어지자 기도회는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사흘이 넘어서면서 교회는 울음바다가 됐다. 1주일로 예정됐던 기도회는 2주째 계속됐다. 여수 애양원을 세워 한센인들을 도왔던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1902~1950) 목사도 9월 13일 기도회에서 ‘한국에 미친 화벌의 원인’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할 예정이었지만 좌익에게 납치되는 바람에 참석하지 못했다. 눈물과 통곡의 기도회를 마친 며칠 후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다는 뉴스가 호외로 전해졌다.

사회를 향한 초량교회의 사역은 ‘빛과소금복지재단’으로 이어지고 있다. 재단의 시작은 IMF 외환 위기 사태. 실직자와 당장 끼니를 잇기 어려운 이웃들, 노숙인이 거리로 쏟아졌다. 교회는 베어드관(館) 1층에 쌀통을 놓고 누구나 퍼갈 수 있도록 했다. 매달 80㎏짜리 쌀 100가마가 사라졌다. ‘사랑의 쌀’ 캠페인은 수년간 지속됐고. 교회는 구제 사역을 체계화하기로 하고 2005년 1월 재단을 설립했다. 현재는 불우이웃뿐 아니라 장애인, 노인, 어린이 복지 사업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 김대훈 담임목사는 “우리 교인들은 ‘초량교회 교인답게’라는 역사 의식, 책임 의식과 자부심이 무척 강하다”며 “단순히 역사 깊은 교회로서 자부심이 아닌 이 시대에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는 교회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부산=김한수 종교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