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선보인 세계청년대회 십자가와 성화. /서울대교구

40년 동안 전세계를 순례하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높이 3.8미터짜리 나무 십자가지요. 이 십자가는 1984년부터 유럽을 시작으로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남북미,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등을 계속 순회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비행기, 범선, 경비행기, 어선, 트럭 심지어는 개썰매도 타고 이동합니다. 방문하는 곳도 각 지역의 성당은 물론이고 교도소, 학교, 유적지, 시내의 거리, 공원 등 다양합니다. 9·11테러의 현장인 미국 뉴욕 ‘그라운드 제로’도 찾았습니다. 이 십자가의 순례 과정에는 항상 그 나라의 젊은이들이 함께합니다. 항상 세계 곳곳을 순회하다 보니 ‘수리’가 필요해 로마도 돌아가기도 한답니다. 이 십자가는 이름도 여러 가지입니다. ‘성년(聖年·Holy Year) 십자가’ ‘희년(禧年·Jubilee) 십자가’ ‘순례자 십자가’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지요. 가톨릭 세계청년대회(WYD·World Youth Day)를 상징하는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가 지금 한국에 와 있습니다. 2027년 서울에서 세계청년대회가 열리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세계청년대회 십자가는 올림픽으로 치면 성화(聖火) 같은 상징물입니다. 올림픽 성화는 그리스에서 채화(採火)돼 5대양 6대주를 순회한 후 개최지에 도착해 주경기장에서 올림픽 기간 내내 불을 밝히지요. 세계청년대회 십자가는 세계청년대회가 열리는 장소의 개·폐막 미사가 열리는 곳에 서 있게 됩니다. 올림픽 성화가 올림픽이 열리는 해에 채화돼 개최지를 향해 봉송된다면, 이 십자가는 세계청년대회가 열리지 않는 해에도 항상 세계를 순례하고 있다는 점이 차이입니다.

이 십자가를 세계청년대회 상징물로 지정한 것은 요한 바오로2세 교황입니다. 1983~1984년은 가톨릭의 ‘구원의 특별 성년(聖年)’이었습니다. 이때 요한 바오로2세 교황은 바티칸 성 바오로 대성당 제단 옆에 상징물 십자가 설치를 지시했지요. 이듬해인 1984년 4월 성년이 끝날 때 교황은 이 십자가를 청년들에게 맡겼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했지요.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성년을 마무리하며 저는 이 희년의 표징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여러분에게 맡깁니다. 인류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상징으로 이 십자가를 전 세계에 들고 다니며, 구원과 구속(救贖)은 오직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모든 이에게 선포하십시오.”

40년간 세계를 순회하고 있는 가톨릭 세계청년대회 십자가의 모습. /교황청 평신도가정생명부 홈페이지

이 권유에 따라 첫 순례지는 그해 7월 독일에서 이뤄졌습니다. 당시 뮌헨에서 ‘가톨릭 신자 대회(가톨릭켄탁)’가 열렸는데 12만명이 모인 성체성사 제대 옆에 서있었습니다. 이어 프랑스 루르드 등을 돌았는데 교황은 “체코에도 가야 한다”고 해서 1985년 당시 공산국가였던 체코도 순회했습니다. 이탈리아, 프랑스, 룩셈부르크,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몰타, 독일 등을 또 순회했지요. 이때까지는 세계청년대회 창립 이전이었습니다.

1986년 세계청년대회가 로마에서 창립됐을 때 십자가는 처음 본격적으로 등장했지요. 이듬해인 1987년엔 제2회 세계청년대회가 아르헨티나에서 열렸는데 이때 십자가는 아메리카 대륙을 순회했습니다. 1988년엔 미국도 방문했고요. 1989년에 이 십자가는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한국에도 왔습니다. 그해 10월 서울에서 열린 세계성체대회에 ‘참석’한 것이지요. 당시 요한 바오로 2세와 김수환 추기경 뒤에 서있는 십자가의 기록 사진이 있습니다.

세계청년대회 십자가는 지난 1989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성체대회 때에도 한국을 찾았다. 요한 바오로2세 교황과 김수환 추기경 뒤에 서있는 십자가다. /가톨릭신문

처음엔 그저 ‘나무 십자가’일 뿐이었지요. 그런데 이 십자가는 점점 희망과 사랑, 구원의 의미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요한 바오로2세 교황의 관심 덕분이었습니다. 요한 바오로2세는 “이 십자가는 한 대륙에서 다른 대륙으로 이동하며 모든 곳에서 온 젊은들이 모여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이에게 동일하며 그분의 메시지는 항상 동일하다는 사실을 함께 경험한다” “십자가를 껴안고 손에서 손으로 전달하는 것은 매우 설득력 있는 제스처입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주님, 우리는 호산나의 순간에만 당신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 않고, 당신의 도움으로 당신의 어머니이자 우리의 어머니인 마리아, 사도 요한처럼 십자가의 길에 동행하기를 원합니다”

밀레니엄을 앞둔 1998년 요한 바오로2세는 이렇게 말했지요. “세 번째 천년의 성인(成人)이 될 여러분에게 이 십자가가 맡겨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여러분 존재의 의미와 선교 열정의 원천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2000년엔 이탈리아 전역을 십자가를 메고 순례한 젊은이들은 십자가에 대해 “단순한 나무 십자가가 아니라 우리가 매일 짊어져야 하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고도 말했지요.

2003년엔 ‘동행’이 추가됐습니다. ‘살루스 포풀리 로마니’(Salus Populi Romani)라는 성화(聖畵)입니다. 로마의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에 봉헌된 가로 79㎝, 세로 117㎝ 크기 성화의 복제품입니다. 이 성화의 이름은 ‘로마 백성의 구원자 성모’란 뜻인데 동로마제국에서 제작돼 AD 500년 무렵 로마로 전해졌다고 하지요. ‘건강’이라는 뜻에서 보듯이 이 성화는 전염병이 돌 때 로마 시민들을 지켜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십자가가 순회한 나라 숫자를 헤아려보니 대략 70개국이 넘더군요. 유럽과 북미-중남미 대륙 등은 물론이고 아프리카에서도 세네갈, 가봉, 탄자니아 등 20개국이 넘고,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수많은 섬나라도 순회했더군요.

지난 11월 29일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열린 WYD 십자가와 성화 환영의 밤 행사. 사진 오른쪽 뒤 제대 옆에 십자가와 성화가 보인다. /서울대교구

이렇게 늘 세계를 순회하는 십자가와 성화가 지난달 24일 한국에 전달됐습니다. 바티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켜보는 가운데 작년 세계청년대회 개최국인 포르투갈 리스본 젊은이들이 다음 개최국인 한국 서울의 청년들에게 십자가를 전해주는 방식이었지요. 이 십자가와 성화는 11월 29일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WYD 십자가·성화 환영의 밤’을 통해 공개됐습니다. 이어 인천교구를 시작으로 대구대교구(11일)에 1주일, 수원교구(18일)에서 열흘 순회하고 30일엔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이후엔 명동대성당에 놓여 있다가 2026년부터는 다시 세계를 순회하고 2027년 세계청년대회 개막 전에 서울로 돌아올 예정이라고 합니다. 40년간 전세계를 순회하며 세계 젊은이들의 신앙의 손길이 닿은 십자가와 성화를 한국에서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