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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山門) 건설은 당시 통도사 1년 예산에 버금가는 금액이어서 우선 빚을 내서 짓고, 내가 금니사경(金泥寫經) 전시회 열어 작품 팔아서 주지 임기 마치기 전에 다 갚았지요. 그 빚을 갚은 후로 내 작품은 주도(주지도) 팔도(팔지도) 않아요.”
최근 경남 양산 통도사 서운암에서 만난 조계종 종정 성파(性坡) 스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얼마 전 ‘오마이갓’을 통해 통도사 산문이 국내 사찰 산문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지요. 그 이야기를 여쭈러 스님을 뵌 것은 아니고요, 지난봄 성파 스님의 살아온 이야기를 대담으로 정리한 ‘일하며 공부하며, 공부하며 일하며’(샘터)를 펴낸 후 이따금 성파 스님을 찾아뵙곤 합니다. 특별한 주제 없이 이런저런 말씀을 듣곤 합니다. 이번에도 산문 건설에 얽힌 뒷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우연히 산문 이야기가 나오자 스님은 뜻밖에 ‘빚’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1980년대 당시에 통도사 1년 예산이 2억쯤이었는데, 산문 예산이 1억쯤 됐던 것 같아요. 산문을 지어야 겠는데 모델도 없고, 예산도 없어요. 당시에는 시주자도 없고 국비(國費), 도비(道費) 지원을 받을 수도 없고. 그래서 빚을 냈지요. 그때는 절에 저당 잡힐 것도 없어서 한번에 다 빌리지도 못하고 근처 마을 사람들 한 40~50명을 보증인으로 세우고 농협에서 빚을 냈어요. 그렇게 해서 공사를 시작했지요.”
산문 공사는 난관의 연속이었다고 합니다. 우선 ‘길’ 위에 문을 세우는 일은 당시로서는 처음이었기에 건축허가부터 난감했답니다. 지금은 전국 유명 사찰에 산문이 설치돼 있지만 당시로서는 전인미답의 길이었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답니다. 당시 군수에게 “문제가 생기면 언제라도 철거하겠다”는 각서를 쓰고 허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절 안팎에선 “젊은 주지가 통도사 기둥 뿌리 뽑겠다”며 걱정이 많았답니다. 게다가 마을 주민들까지 빚 보증을 섰으니 만약 갚지 못한다면 보통 문제가 아니었겠지요.
그러나 성파 스님은 “봄에 씨뿌리는 사람 심정으로” 산문 건설을 밀어붙였다지요. 성파 스님은 왜 이런 대담한 결정을 했을까요. 물론 당시 사찰 경내에 여관과 식당까지 들어와 있는 현실을 정리하려는 목적이 컸지요. 당시 통도사 경내까지 도립공원 부지로 예정돼 유원지처럼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도 있었고요. 그렇지만 스님의 목표는 더 원대했습니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불교와 사찰 역사의 가치를 왜 사장(死藏)시키느냐”는 것이었답니다.
“무엇이든 ‘열었다’ 하는 것은 의미가 있어요. 큰 사찰을 창건한 것을 불교에서는 ‘개산(開山)’이라고 해요. 산문을 열었다는 뜻이지. 창건, 즉 개산 자체가 산문을 열었다는 뜻이니 거기서 착안해 ‘영축산문’이라고 이름을 붙였지요. 회사 창사 기념일이 있고, 학교도 개교 기념일이 있잖아요? 그렇게 산문을 짓고 창건을 기념하는 개산대제를 시작했어요. 통도사 역사를 기념하고 보여주자는 것이지요. 지금은 전국의 사찰이 개산대제를 열고 있어요. 그때도 생각이 있었어요. 우리가 산문과 개산대제를 시작하면 전국적으로 확산될 것이라고요. 우리나라에 10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사찰이 얼마나 많은데, 그 사찰 전체가 다 (개산대제를) 하면 대단한 문화로 정착될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절은 세월이 지나면 폐사(廢寺)가 될 수도 있지만 개산대제라는 무형의 문화는 남는 것이니까요. 우리 불교는 이것만 가지고도 이야기할 거리가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지요. 아무리 큰 산이라도 성냥 알갱이 하나로 불 붙는 법입니다. 나는 성냥 알갱이 하나 던지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지요.”
성파 스님은 ‘일하며 공부하며, 공부하며 일하며’에서 통도사 주지 재임 시절의 보람으로 성보박물관과 산문 건설, 개산대제를 꼽았습니다. 하나 같이 사찰을 중심으로 이어져온 한국의 전통문화를 보존·계승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빚은 어떻게 됐을까요.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스님이 ‘금니사경’ 전시회를 열어 작품 판매 수익금으로 모두 갚았답니다. 금니사경이란 금박 가루로 경전을 베껴 쓴 작품입니다.
“통도사 주지이던 시절에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금니사경전’을 열어 전시장을 꽉 채웠어요. 거기서 다 팔리고 주문까지 받았지. 서울 전시 후에 부산에서 한 번 더 전시를 했는데, 그걸로 빚 다 갚았어요. 내가 주지 맡을 때 빚 8000만원인가 안고 시작했는데, 마칠 때는 그 빚 다 갚고 몇 억인가 남겨서 물려줬어요.”
과연 탄허 스님이 ‘경영에 관해서는 조계종에서 최고’라고 칭송했다는 성파 스님다운 방식이었습니다. 성파 스님은 1970년대초 서울 석파정에서 탄허 스님의 ‘화엄경’ 번역 교정 작업을 도운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쌍용그룹 김성곤 회장의 후원으로 작업을 하던 중 후원금이 바닥 날 지경이었는데, 성파 스님이 중고 조판기를 구입하자는 아이디어를 낸 덕분에 비용을 크게 절약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탄허 스님은 ‘조계종에서 경영에 관해서는 성파 스님이 최고’라고 칭찬했다고 합니다.
산문 건설 빚을 갚기 위해 열었던 금니사경 전시는 성파 스님이 쪽염색 등 전통 염색의 길로 접어들게 된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전시를 열 당시에만 해도 스님은 감지(紺紙) 즉 쪽으로 염색한 종이를 몰랐답니다. 그래서 그냥 검은 종이에 금가루로 경전을 썼다지요. 전시 후에야 과거 고려시대의 금니사경은 감지에 썼다는 것을 알게 된 스님은 직접 연구해 쪽을 재배하고 쪽물을 들인 종이를 제작했지요. 이후 쪽에 멈추지 않고 전통 염색 전반으로 연구를 확대했고요. 스님이 지금까지 해온 일들은 대개 이런 식으로 인연따라 이어졌습니다. 도자기, 16만 도자 대장경, 야생화, 산수화, 옻칠민화 등이 서운암과 통도사를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평생에 걸쳐 이룰까 말까 한 일을 벌이느라 성파 스님은 잠시도 쉬지 않고 일합니다. 모두 전통문화를 지키고 현대에 계승하려는 노력이지요.
한시도 쉬지 않고 일하는 스님 덕분에 스님이 머무는 서운암 풍경은 수시로 바뀝니다. 이번에도 가보니 서운암은 불과 몇 달 사이에 또 풍경이 변했더군요. 성파 스님은 책 제목처럼 평생 ‘일하며 공부하며’를 실천한 분이지요. 잠시도 쉬지 않고요. 지난봄 스님은 서운암 작업실 옆 야산 언덕에 진달래를 쫙 심어서 진달래 꽃밭을 만드셨지요. 이번엔 정면 풍경이 바뀌었더군요. 옻칠작업실 옆에 있는 가로 50m, 세로 25m, 깊이 1.5m짜리 연못의 사방으로 차(茶)나무를 심으셨더군요. 차밭 가운데 연못이 떠있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스님은 연못을 “물로 만든 캔버스”라고 했습니다. 하늘, 달, 별, 새 등 물에 비치는 모든 것이 작품이라는 이야기이지요. 스님의 이야기 보따리 속에서 또 무엇이 나올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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