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전주교구 권상연성당의 십자고상. 벽에 구멍을 뚫어 만든 ‘빛의 십자가’에 예수가 매달린 형상이다. 정미연 작가는 “병을 겪으며 기도 중에 떠오른 영감을 바탕으로 예수님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말했다. /권상연성당

이 성당은 조명이 꺼져있을 때 더 감동적이다. 성전 문을 열면 먼저 정면의 은은한 ‘빛의 십자가’가 들어서는 이를 맞는다. 벽면을 십자(十字) 모양으로 뚫어 빛이 통과하며 만든 십자가다. 자세히 보면 그 십자가 앞에 사람 형상이 보인다. 못 박혀 매달린 예수다. 바로 밑에서 올려다본 예수의 얼굴엔 고통보다는 평온함이 깃들어 있다. 빛과 조각 작품이 어우러진 십자고상(十字苦像). 신자석 좌우 벽에는 세로로 홀쭉한 창(窓)이 7개씩 나 있다. 왼쪽에는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1759~1791)과 권상연(1751~1791)의 삶과 순교, 그리고 시복식 장면 등이 스테인드글라스로 그려졌다. 오른쪽 일곱 창에는 성모 마리아의 일곱 가지 고통이 묘사돼 있다. 뒤로 돌아 입구쪽을 보면 2층엔 부활한 예수를 따르는 군중의 모습을 담은 대형 스테인드글라스가 이 미사를 마친 신자들을 배웅한다. 성당 안팎의 모든 성미술에서는 같은 화풍(畵風)이 느껴진다.

전주 권상연성당 십자고상의 예수 얼굴. 고통을 벗어나 편안한 표정을 담고 있다. /김한수 기자

2일 천주교 전주교구장 김선태 주교의 주례로 축성식을 갖는 전북 전주시 ‘권상연성당’(효자4동성당)은 순교자 권상연을 기념하는 성당이다. 200여 점에 이르는 성미술을 모두 정미연(68) 작가가 맡았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동상과 회화, 스테인드글라스 등 성당의 성미술을 한 작가가 전담하기는 국내 천주교계에서 이례적이다. 해외에서는 마티스가 성미술을 도맡은 프랑스 남부 방스(Vence) 지방의 로사리오성당 등이 유명하다.

전주 권상연성당 내부. 정면 제대 좌우로는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의 동상이 벽감에 설치됐다. 왼쪽 벽에는 순교자들의 삶과 순교, 오른쪽 벽에는 성모 마리아의 고통을 묘사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설치됐다. 모두 정미연 작가의 작품이다. /김민곤 작가 사진

순교자 영성과 성미술이 조화를 이룬 이 성당은 박상운(48) 주임신부와 정 작가가 설계 단계부터 마음과 정성을 모아 만든 ‘작품’이다. 박 신부가 조립식 임시 건물이던 효자4동성당에 부임한 것은 2020년 초. 주변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인구가 늘면서 성당을 새로 지어야 하는 임무를 맡았다. 설계가 한창이던 2021년 3월 전주교구 초남이성지에서 윤지충·권상연의 유해가 발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촌지간인 윤지충·권상연은 명문가 출신 엘리트로 천주교 신자가 된 후 북경 주교의 지시에 따라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살랐다가 대역죄인으로 몰려 1791년 전주 남문 밖에서 처형당했다. 한국 천주교 최초 순교였다. 이들은 지난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복자(福者)로 시복(諡福)받았지만 유해가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랬던 이들의 유해가 2021년 기적처럼 발견된 것.

권상연성당 스테인드글라스. 윤지충 권상연 등 한국 천주교 최초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 순교, 시복 과정을 담고 있다. /김민곤 작가 사진

이 발견을 계기로 박 신부는 교구장 김선태 주교에게 “전주교구에서 새로 짓는 성당은 최초 순교자를 기념하자”고 건의해 받아들여졌다. 당시 먼저 건축 중이던 서곡성당은 ‘윤지충성당’, 효자4동성당은 ‘권상연성당’으로 결정됐다. 윤지충·권상연·윤지헌 순교자의 유해 일부도 모셔왔다. 이에 따라 성당 건축의 콘셉트도 ‘신도시 성당’에서 ‘순교자 기념 성당’으로 바뀌었고, 당연히 성미술도 일반 성당과는 달라야 했다. 그때 박 신부 머릿속에 떠오른 인물이 정 작가였다. 세례명이 ‘테레사’인 정 작가는 그동안 서울·대구·전주·원주·제주교구의 주보(週報)에 성화(聖畵)를 연재하는 등 성미술 작업에 매진해왔고, 박 신부의 직전 근무지였던 전북 익산 여산성지의 성미술 작업을 함께 진행한 인연도 있었다.

신축된 전주시 효자4동성당. 2일 축성식 이후 정식으로 ‘권상연성당’으로 명명된다. /권상연성당

작년 박 신부에게 작품 의뢰 연락을 받았을 때 정 작가는 췌장암 수술 후 항암 치료 12번을 막 마치고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항암 치료 중 방울방울 떨어지는 링거를 보면서 ‘고통을 통해 주님이 당신을 더 가까이 부르고 있는 것’이라는 말씀이 큰 위로가 됐다. 그런 마음을 담아 작품을 만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성미술에선 예수와 성모, 순교자들이 겪었던 고통을 어루만지는 치유 분위기가 느껴진다. 작품 제작에는 스테인드글라스 대가인 조광호 신부, 박장근 조각가 등 분야별 전문가의 도움도 받았다.

권상연성당 박상운 주임신부(오른쪽)와 성미술을 담당한 정미연 작가. /김한수 기자

정 작가는 “과거에도 십자고상(十字苦像)을 여러 점 제작했지만 병을 겪은 후 만든 이번 작품에 특별히 애착이 간다”고 했다. 박 신부는 성당 건축을 지휘하는 동시에 전국의 성당 60여 곳을 찾아다니며 순교 역사에 대해 강의하고 후원을 호소해 건축비를 마련했다. 박 신부와 정 작가는 “권상연성당이 처절한 순교를 기억하는 동시에 치유하는 공간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권상연(1751~1791)

1791년 고종사촌인 윤지충(1759~1791)과 함께 순교한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 그해 윤지충의 모친상 때 윤지충은 북경 주교의 지침에 따라 제사를 올리지 않고 위패를 불살랐으며, 권상연도 조상의 위패를 불살랐다. 조정은 두 사람을 대역죄인으로 참수형에 처했다. ‘신해박해’ 혹은 ‘진산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천주교 박해의 신호탄이 됐으며 정치적으로는 남인 세력이 몰락하는 계기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