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용 비행장이 있던 허허벌판 서울 여의도에 1970년대 초 두 개의 돔(dome)이 들어섰다. 1973년 완공된 여의도순복음교회와 1975년 준공된 국회의사당이다. 시범아파트 정도밖에 없던 시절, 여의도에 교회와 의사당이 먼저 들어섰다는 점은 상징적이다. 영적(靈的)인 전당과 민의(民意)의 전당이라는 두 기둥이 여의도 빈 공간에 먼저 세워진 셈이기 때문이다. 그 후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의 역사는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 역동적이었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65년 역사는 대한민국 현대사와 정확히 겹쳐진다. 1958년 조용기 전도사가 서울 은평구 대조동에서 교회를 시작할 때 한국의 1인당 GDP는 80달러. 전쟁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극빈국이었다. 경상도, 전라도에서 먹고살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가난한 이들이 넘쳐나던 시절. 병자도 많았다. 조 목사는 남대문시장에서 24인용 미군 텐트를 사서 리어카에 싣고 대조동까지 걸어왔다. 땅도 없어서 남의 깨밭에 천막을 치고 바닥엔 가마니 깔고 예배를 드렸다. 교회도 성도도 모두 가난했다. 조 목사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희망’과 ‘하나님’을 이야기했다. 조 목사는 생전 인터뷰에서 “아무리 둘러봐도 희망이라곤 예수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조 목사의 설교 트레이드 마크인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는 당시의 시대정신이기도 했다. 경제개발계획과 수출 진흥, 새마을운동으로 한국 경제가 기지개를 켜고 이병철, 정주영, 김우중 등 경제인이 세계 시장을 누빌 때 조 목사는 지구 120바퀴를 돌며 하나님과 희망을 전했다. 결과는 놀라운 부흥이었다. 1979년 10만명을 넘긴 성도 숫자는 1992년 70만을 넘어 1993년 78만명으로 기네스북에 세계 최대 교회로 등재됐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2000년대 들어 ‘성장’에서 ‘성숙’으로 전환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의 어려운 이웃을 섬기는 일에도 더욱 앞장서고 있다. 촉매가 된 계기는 2008년 이영훈 담임목사의 부임. 교회는 2013년부터 매년 예산의 3분의 1 이상을 구제·선교에 사용하고 있다. 2014년 세월호 사고 이후엔 침체된 경기 안산의 재래시장을 이영훈 목사와 성도들이 12회에 걸쳐 방문해 물건을 구매하는 ‘안산 희망 나눔 프로젝트’를 펼쳤다. 2012년부터 매년 연말 어려웃 이웃에게 배달하는 ‘희망 박스’도 24만 7000여 개에 이른다. 핼러윈 참사 희생자 유가족 위로금으로 10억원을 전달하고, 2023년 튀르키예·시리아 대지진에도 여의도순복음교회와 기하성 교단은 10억원을 지원하는 등 국내외 재난·사고를 당한 이웃에 대한 도움의 손길도 아끼지 않았다. 코로나 팬데믹 와중엔 세계 미디어의 시선이 여의도순복음교회로 쏠리기도 했다. 거리 두기 단계가 바뀔 때마다 예배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서였고, 교회는 항상 모범을 보였다. 그뿐 아니라 비대면 온라인 예배 장비가 없는 미자립 교회를 지원하기도 했다.
이런 성숙한 모습은 다시 교회 성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2010년 제자 교회 20여 곳을 인사·재정적으로 독립시켰다. 당시 78만 성도가 45만으로 줄었다. 그러나 최근 여의도순복음교회 성도는 57만명으로 늘었고, 제자 교회와 독립지교회를 포함하면 전체 89만명으로 성장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창립 65주년을 맞아 17~21일 대기도회, 23일 신학 콘퍼런스, 30일 기념 음악회 등 기념행사를 마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