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6·25 전쟁 발발 1주년을 맞아 해군사관학교를 방문한 이승만(왼쪽에서 둘째) 대통령이 손원일 해군참모총장과 함께 생도들을 사열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남의 나라를 침손(侵損·침범해 해를 끼침)하거나 남의 강토를 점령하자는 생각은 소호(小毫·털끝만큼)도 없지만, 남이 우리를 침해하고 무시한다면 우리는 우리 강토와 우리 해면 안에서는 그런 나라들과 화평으로 지낼 수 없다는 결심을 세계에 표명할 수 있는 해군을 건설해야 한다.”(1949년 8월 21일 이승만 대통령의 연설)

실로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상황이었다. 1948년 수립된 신생 대한민국은 바다 건너 북·서와 남·동 양면에서 군사적 위협을 받고 있었다. 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이승만 정부는 이 같은 위협에서 양면 방어가 모두 가능한 해군 건설을 추진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최근 ‘국제정치논총’ 62집 4호에 연세대 박사과정 이호준씨와 함께 논문 ‘6·25 전쟁 이전 이승만 정부의 해양위협 인식과 해군정책, 1948-1950′을 실었다. 지금까지 육군 중심의 군사(史)에 가려져 거의 연구되지 못했던 대한민국 초기 해군 정책에 대한 논문으로, 이승만 정부가 강력한 요청을 통해 미국에서 군함을 구매하기 위한 군사원조 자금을 받았다는 등의 사실을 밝혔다.

논문은 당시 이승만 정부가 북쪽 방면에서 잠수함을 포함한 소련 해군의 적대적 활동, 북한 인민군의 해양 침투 가능성을 위협으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서쪽에선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중국공산당이 황해 제해권을 확대했고, 남·동쪽에선 일본 어선의 출몰과 일본 재무장의 위협이 존재했다.

특히 소련의 위협이 컸다. 1949년 3월 스탈린은 김일성과 청진·나진·원산 3개 항구를 30년 동안 조차(租借·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영토를 빌려 일정 기간 통치하는 것)하는 협정을 체결했고, 태평양함대에 80여 척의 잠수함을 배치했다. 소련 잠수함이 근해에 출몰하며 한국 함정을 공격하는 일도 생겨났다.

당시 소련은 독일 잠수함 시설을 접수해 10여 척의 U보트를 나포하고 기술자들을 대거 확보한 뒤 잠수함 성능을 높였다. 일부는 미 해군 대잠수함작전 능력으로도 탐지와 추적이 어려웠다. 1949년 3월 신성모 국방장관은 소련 잠수함의 출현이 제주도와 여수·순천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라며 그 근거로 ▲소련 잠수함이 제주도 근해에서 빈번히 발견되고 있으며 ▲제주도 공산주의자들이 소지한 무기의 상당 부분이 소련제라는 것을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 정부는 위협에 대비할 수 있는 해군 건설을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펼쳤다. 미국 정부에 함정 원조와 해군고문단 파견을 요청했고,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을 미국에 보내 백두산함을 비롯한 4척의 구잠함(驅潛艦)을 구매했다. 구잠함은 적군의 잠수함을 침몰시키는 것이 주 임무인 군함이다.

지금까지 백두산함은 국민 성금으로 구입했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대부분의 구입 자금은 이승만 대통령이 끈질기게 미국 측에 요청한 결과 육군 위주로 편성됐던 미국의 군사원조 자금 일부를 해군 지원으로 돌린 것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미군과의 전략적 협력을 모색하기 위해 진해를 해군기지로 사용할 것을 미국에 제안했고, 해군을 육성하기 위해 국방부를 육군부와 해군부로 이원화하는 방안도 고려했다.

이 같은 해군 정책은 전쟁이 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 미국의 비협조와 한국의 미약한 경제력 등으로 인해 한계에 부딪혔지만, 6·25 전쟁 때 백두산함이 대한해협해전에서 승리를 거두는 등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는 것이다. 전쟁 발발 당시 한국 해군 병력은 약 7000명이었고, 현재는 약 7만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