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에 파송된 미국 남장로교 소속 '7인의 선발대' 선교사들. 전주시기독교근대역사기념관에 전시된 사진. /김한수 기자

“술을 마시거나 집에 술을 보관하고 있습니까?” “귀신이 두렵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 남자가 두 아내를 두는 게 옳습니까?” “빵과 포도주는 무엇을 뜻합니까?”

지난 10월 6일 한교총 순례단이 방문한 전주시기독교근대역사기념관 2층 전시실엔 이런 문구들이 적힌 벽이 있었다. 세례를 받기 전에 기독교 신자로서 자격을 갖췄는지 점검하는 질문을 적은 전시물이었다. 질문 내용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일견 생소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세례문답이 이뤄진 시점은 1세기 전. 농한기면 노름과 술판이 벌어지고, 부자들의 축첩(蓄妾)이 낯설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대에 기독교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과거와 다른 사람’ ‘보통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 되겠다는 선언이었다. 기독교는 그렇게 한국인을 ‘근대적 인간’으로 재탄생시켰다.

전주시기독교근대역사기념관에 전시된 세례 전 점검 질문. 음주와 축첩 등 당시의 나쁜 관습을 끊으려는 선교사들의 노력이 보인다. /김한수 기자

전주와 광주 등 호남 지역 선교는 미국 남(南)장로교가 주로 담당했다. 미국 장로교는 남북 전쟁 이후로도 남북(南北) 장로교 조직이 나뉘어 있었다. 새문안교회와 연세대를 설립한 언더우드 선교사는 북장로교 소속이었다. 조직은 나뉘어 있었지만 한국 선교에 대한 열정은 하나였다. 한국 파송 7년만인 1891년 안식년을 맞은 언더우드 선교사는 귀국해 시카고, 내슈빌 등을 순회하며 한국 선교에 대해 강연했다. 이때 감명받은 테이트, 존슨, 레이놀즈, 전킨 등은 자신들을 한국 선교사로 파송해 줄 것을 남장로교에 청원했다. 북장로교 선교사의 강연에 남장로교 청년들의 가슴이 뜨거워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미국 남장로교는 이들의 청원을 거부했다. “새 선교 사업에 착수할 가망이 없다”는 이유였다. 청년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각 지역의 교회를 통해 호소하고 언론에 “왜 우리는 한국에 가기를 원하는가”라는 호소문도 실었다. 결국 1892년 미국 남장로교는 선교사 7명을 파송하기로 결정한다. 이른바 ‘7인의 선발대(7 Pioneers)’이다. 테이트, 전킨, 레이놀즈 등 남성 3명과 테이트 목사의 동생 매티 테이트, 레이놀즈의 부인 팻시 볼링, 전킨의 부인 메리 레이번 그리고 리니 데이비스 등 여성 4명이었다.

초기 선교사들은 복음과 교육, 의료 선교가 유기적으로 이뤄지도록 '3각 선교 원칙'을 지켰다. 삼각선교 원칙의 개념을 설명하는 전시물. /김한수 기자

7인의 선발대는 전주를 중심으로 복음·교육·의료의 ‘삼각 선교’를 펼쳤다. 곡창 지대인 호남은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수탈이 끊이지 않았다. 선교사들은 잇따른 수탈과 동학농민운동의 좌절로 피폐해진 민중들을 보듬었고 마음을 얻었다. 1893년 전주 은송리에 예배처소를 마련하며 시작한 서문교회는 1906년까지 호남에 65개 교회를 설립할 정도로 확산 속도가 빨랐다. 남학교인 신흥학교와 전킨 선교사를 기념해 설립한 기전(紀全)여학교를 세워 근대 교육에 앞장섰다. 볼티모어 여자의대를 수석 졸업한 여의사 마티 잉골드의 합류로 의료 선교도 본격화 됐다. 잉골드는 “이제까지 주님이 거저 주신 은혜를 받았으니 이제는 나도 한국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거저 주겠다”는 다짐으로 1898년 예수병원을 열었다. 예수병원은 여성과 어린이는 물론 행려병자와 한센인들도 돌봤다. 한때 ‘돈 없어도 예수병원 가면 살려준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예수병원은 오랜 기간 한강 이남에서 가장 큰 병원이었으며 한국 최초로 수련의 제도 도입(1949년) 등 ‘최초’의 역사를 다수 기록했다.

초기 선교사들은 '경쟁이 아닌 연합'의 원칙 아래 효율적인 선교를 위해 교단별로 선교지를 나눠 활동했다. /김한수 기자

10월 7일 개관한 전주시기독교근대역사기념관은 ‘삼각 선교’를 유물을 통해 보여주는 현장이다. 2층엔 복음 선교의 역사, 3층 ‘구바울기념의학박물관’은 예수병원을 중심으로 한 의료선교 역사를 보여준다. 전시관에는 ‘조선 선교사의 한국어 학습 과정’이란 전시물도 있다. 선교사들이 1년차부터 5년차까지 차례대로 해야할 일을 표로 정리했다. ‘한국어’는 ‘듣기·말하기’ ‘읽기·문법’ ‘쓰기’ 등 크게 3가지로 구분하고, ‘조선의 문화와 역사’ ‘성경’ ‘조선 선교 관련 책’ ‘한문’까지 과목도 많다. 그 중 ‘조선의 문화와 역사’ 과목엔 ‘오륜행실 1권 읽고 번역’이 있다. 유교적 관습이 지배하던 당시 조선 민중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오륜까지 배웠던 것이다.

전주시기독교근대역사기념관 3층엔 예수병원의 역사를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이 전시되고 있다. /김한수 기자

기념관 뒷편 언덕에 올라서면 예수병원과 예수대학교, 기전대학교, 신흥고 등 ‘개신교 타운’이 한눈에 들어온다. 기념관 뒷동산의 선교사 묘역은 당시 선교사들이 어떤 희생과 헌신을 했는지 볼 수 있는 현장이다. 채 두 돌이 되기 전에 잇따라 세상을 떠난 전킨 선교사의 세 아들이 잠든 키낮은 묘비는 보는 이의 가슴을 아리게 만든다. 전킨 선교사 역시 이 묘역에 잠들어있다.

전주시기독교근대역사기념관 뒷동산의 선교사 묘역. 가운데가 전킨 선교사 묘비이며 그 아래로 세 아들의 작은 묘비가 있다. /김한수 기자

전주기독교근대역사기념관 관장 최원탁 목사는 “전킨 선교사는 16년간 호남 선교의 기틀을 놓다가 43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세 아들까지 이곳에 잠들었다”며 “이런 희생 위에 이땅에서 기독교가 꽃피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교총 대표회장 류영모 목사는 “전킨 선교사 아기들은 묘비를 보면서 울컥했다”며 “더 가지려고 하는 물량주의, 성장주의 세태 속에서 선교사님들의 삶을 돌아보니 울림이 더 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