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왼쪽 페이지 그림엔 벼랑 끝 작은 집 하나 걸려 있고, 소나무 가지는 바람에 어지러이 흔들린다. 그림 속에서 한줄기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하다. 오른쪽 페이지엔 매월당 김시습의 이런 시가 적혀있다. ‘달은 밝아 그림 같은 산집의 이 밤/홀로 앉은 내 마음 가을물 같네/누가 내 노래에 답하는가/물소리가 길게 솔바람에 섞이네(月明如畫山家夜 獨坐澄心萬盧空 誰和無生歌一曲 水聲長是雜松風)’
최근 발간된 ‘선화와 선시-무애의 붓끝으로 깨달음의 그림자를 그리다’(민족사)는 이처럼 매쪽마다 선시(禪詩)와 선화(禪畵)가 마주 보고 있다. 선시의 대가인 석지현 스님이 국내외 선시 62편을 골라 번역하고, 한국화가 김양수 화백이 시에 어울리는 그림을 그렸다. 고향인 전남 진도 적염산방에 칩거하고 있는 김 화백은 스님이 고른 시를 놓고 몇날 며칠을 구상해 그림으로 옮겼다고 한다.
불교전문 출판사인 민족사는 3년 전쯤 이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언어로 설명이 안 되는 선(禪)의 세계를 시와 그림을 통해 보다 편안하게 대중에게 전하자는 취지였다. 마침 민족사 사무실을 사랑방 삼아 들르며 차를 마시곤 하던 석지현 스님과 김양수 화백이 의기투합했다. 그리고 3년여 작업 끝에 시화집이 완성됐다. 여수 석천사 진옥 스님은 추천사를 통해 “선화는 깨친 사람이 나를 비우고 욕심을 버린 선의 상태에서 관찰된 대상의 마음 그림자를 그린 그림”이라고 말했다.
책에는 특히 회화적인 선시가 많다. 진각선사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장면을 ‘못가에 홀로 앉았네/물밑 한 사내와 서로 만났네/둘이 보며 말없이 미소 짓는 건/그 마음과 이 마음 서로 비치는 때문’이라 읊었고, 김 화백은 이 모습을 수묵으로 담아냈다. 백거이의 ‘귀뚜라미 울다 문득 멈추고/남은 등불 깜박이며 졸고 있네/창밖엔 밤비,/파초 잎에 먼저 소리 있네’란 시 옆엔 파초 이파리 위로 밤비가 쏟아지는 그림이 독자를 맞이한다.
19~28일 서울 사간동 법련사 내 불일미술관에서 출판 기념 전시회가 열려 책에 수록된 작품을 실물로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