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0년 동안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절이 불타고, 무너지고, 헤어진 뒤 다시 만나 옛 모습을 되찾은 이 쌍둥이 신라 석탑은 한국 문화재 수난의 역사를 농축하고 있다. 높이 5.85m의 ‘경주 (전·傳)염불사지 동·서 삼층석탑’ 얘기다. 문화재 명칭에서 괄호 안에 전할 전(傳)자를 넣은 이유는 염불사지라고 전해지지만 아직 확증은 없다는 뜻이다.

‘경주 (전)염불사지 동·서 삼층석탑’의 서탑(왼쪽)과 동탑. /문화재청

‘삼국유사’엔 이런 이야기가 적혀 있다. 경주 남산 동쪽 기슭의 피리촌에 피리사라는 절이 있었다. 그곳에선 이름 모를 승려가 언제나 아미타불을 소리 높여 읊었는데 높낮음이 없이 낭랑했다. 그 소리를 성 안 17만호에 사는 백성들이 들을 수 있었고, 사람들은 그 스님을 ‘염불 스님’이라 불렀다. 그가 입적한 뒤 흙으로 빚은 상을 만들고 피리사의 이름을 ‘염불사’로 바꿨다.

쌍둥이 석탑은 8세기 초 그 염불사로 추정되는 절터에 세워졌다. 두 탑의 높이를 맞추기 위해 동탑은 일부러 기초를 더 쌓았다. 이 절에선 신라 말까지도 다채로운 종교 행사가 지속적으로 열렸다. 그러나 12~13세기 무렵 절은 폐사됐다. 아마도 몽골군이 침공했을 때 불타버린 황룡사 구층 목탑과 같은 운명을 맞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 뒤로 다시는 그곳에 절이 세워지지 않았고, 불에 타지 않은 두 석탑만 덩그러니 남았다.

오랜 세월이 흐르며 두 석탑도 비운(悲運)을 맞게 됐다. 언제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모두 무너져 내린 것이다. 일제강점기 촬영한 유리 건판 사진에서는 황량한 밭 위에 두 석탑 모두 산산조각 난 채로 흩어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963년 두 탑 중에서 동탑만 5㎞ 떨어진 불국사역 앞 광장에 다시 세워졌다. 1층 옥개석(석탑 위에 지붕처럼 덮는 돌)은 너무 파손이 심해 다른 신라 절터인 이거사지의 폐탑재를 가져와 대신 덮었다고 한다. 이거사지는 현재 서울 청와대에 있는 석불 좌상이 원래 있었던 곳이다.

이 탑에 대한 실측 조사는 1983년에야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이뤄졌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03년 염불사지를 발굴 조사한 결과 다행히도 탑의 부재들이 대부분 남아 있는 것을 확인했다. 2009년 두 석탑의 복원 공사가 마무리되면서 헤어졌던 두 탑은 비로소 온전한 모습으로 제자리에서 재회하게 됐다.

지난 29일, 문화재청은 이 두 석탑의 보물 지정을 예고했다. “백제 미륵사지 석탑에서 시작된 전통적 기법이 잘 남아 있으며,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과 양식사(樣式史)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는 것이다. 천여 년을 이어진 기구한 유전(流轉)에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