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 봉황문(사천왕문)에서 일주문쪽을 바라본 풍경. '나를 살린 20일' 저자는 해인사의 암자 중 한 곳인 삼선암에서 20일을 보내며 힐링을 경험한다. /불광출판사

‘기어코 나를 살아내게 해준 그곳, 작은 암자에서의 기록’. 최근 발간된 ‘나를 살린 20일’(불광출판사) 표지에 적힌 구절입니다. 뭔가 간절함이 느껴져서 책을 펼쳐보게 됐습니다. 읽은 후엔 저도 뭔가 힐링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정책 홍보, 문화관광 분야에서 20년 가까이 일한’ 여성 저자 진은섭씨가 ‘번아웃’ 상태에서 해인사 삼선암을 찾아 20일간 평안을 회복하며 일기처럼 적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순간순간 심신의 변화를 포착한 저자의 글솜씨가 250쪽 책을 단숨에 독파하게 만듭니다.

해인사 삼선암 전경. '나를 살린 20일' 저자 진은섭씨는 이곳에서 20일간 지내며 '번아웃'을 극복할 힘을 얻었다고 한다. /불광출판사

‘자부심도, 자존심도 없이 버틴 시간들, 출근하는 아침은 지옥이 됐고, 사무실은 흉물 같고 괴물 같았다.(...) 자주 피로해지고 무기력해졌다. 업무 능력이 떨어지고 두통에, 불면증에 시달렸다. 나이 탓인가? 남들도 다 이러고 살지. 다들 그렇게 사니까. 악착같이 버티는 데 안 아프고 배겨?’

견디다 못해 찾아간 병원, 의사의 진단은 ‘번아웃’이었답니다. 무조건 서울을 벗어나 은둔하고 싶었지만 혼자 사는 엄마에게 짐을 지울 수도 없는 노릇. ‘자연인 체질’인 저자는 아는 언니를 통해 암자를 소개받아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떠납니다.

찾은 곳은 해인사 삼선암. 해인사는 큰 절이고 암자도 많지요. 그렇지만 삼선암은 주지 스님, 법당 스님, 선방 스님 등 비구니 스님 세 분과 공양주 보살 한 명만 사는 고즈넉한 곳이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찾는 이는 더욱 드물었던 어느 겨울날 저녁, 주지 스님은 찾아온 저자에게 말했습니다. “이곳에서 지켜야 할 건 없고 다 알아서 하라. 삼시세끼 시간만 지키면 된다. 우리는 김치밖에 없다. 밥은 직접 해 먹어도 된다길래 받아준 기다.”

‘휴식형 템플스테이’입니다. 그렇게 20일간의 동면(冬眠)이 시작되지요. 일상에서 20일은 눈 깜짝할 새 지납니다. 그러나 와이파이도 안 터지고, 인적 드문 암자에서 시간은 천천히 흐릅니다.

◇목표 ‘후회 없는 한량 생활’

저자는 암자에서 목표를 ‘후회 없는 한량’으로 정했습니다. 스스로 정한 최소한의 규칙은 ‘자발적 고립’과 ‘하루 최소 8시간 묵언’.

냉기 가득한 법당. 예불을 마치자 ‘법당 스님’은 “나는 금강경을 외울 테니 보살님은 108배를 하세요”라 합니다. ‘한석봉도 아닌데, 쉬러 왔는데 108배?’ 저자의 표정을 읽은 스님은 “절하면 안 추워”라고 합니다. 목표를 조금씩 수정하며 암자 생활에 적응합니다.

해인사 안내도. 법보종찰 해인사는 8만대장경을 소장한 장경판전을 비롯한 많은 전각과 암자가 있다. 삼선암은 지도의 중앙 아래 부분에 위치해 있다. /해인사 홈페이지

◇미니멀 라이프

삼선암은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금단 현상을 느끼지요. 와이파이 무료 구역도 찾아냅니다. 성보박물관 카페 앞 흔들의자와 인근 약수암 담장 부근입니다. 가끔 여기를 찾아 밀린 카톡 메시지도 확인하고 동영상도 봅니다. 시도 때도 없이 울리던 카톡 알림음이 사라지자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는 소리가 우렁차게 들립니다. 작은 행복입니다.

냄새에도 민감해집니다. 암자에서는 자주 씻지 않습니다. 샤워실도 없지요. 목욕은 5일, 머리 감기는 3일에 한번 정도 합니다. 그런데 신경 쓰이는 냄새는 자주 씻지 않아서 나는 체취가 아니랍니다. 오히려 씻고 난 후에 바르는 핸드 크림 냄새가 민폐랍니다.

자연스럽게 생활이 간소화됩니다. 패딩은 웃풍을 막는 문 가림막과 무릎 덮개로, 캐리어는 책상과 식탁으로 용도가 다양해집니다. 여벌로 준비한 옷, 양말, 안경은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고요.

해인사 원당암 전경. '공부하다 죽어라'는 말로 유명한 혜암 스님이 머물던 암자다. /불광출판사

◇최애 장소

가장 마음에 드는 장소도 찾았습니다. 삼선암 내 약사전 앞 돌계단. 새벽 4시 무렵 별 보기 가장 좋은 곳도 발견합니다. 인근 원당암 선방(禪房) 처마 밑 모서리랍니다. 저자는 “우주의 별을 그물망에 몰아놓은 것 같다”고 말하지요. 산에서 밤을 지샌 분들이라면 그 느낌 아실 겁니다.

여러 가지 산책 코스도 개발하지요. 가장 먼 코스는 마애불까지 왕복하는 등산이고, 조금 ‘빡세게 운동하고 싶을 땐’ 오르막 경사가 있는 원당암까지 걷습니다. 편안하게 산책하고 싶을 땐 경사가 완만한 약수암이나 성보박물관쪽으로 걷고요.

◇음식

저자는 소화 문제로 고생했답니다. 폭식, 부정기적인 식사 때문이었지요. 암자에서 스님들의 전통 식사법인 발우공양을 하면서 이런 생각을 털어놓습니다. “무엇보다 발우공양은 먹는 행위 그 자체에 집중해서인지 평소와 다르게 나 자신과 대화하는 것 같다. 나를 만나는 또 다른 방식, 음식을 씹고 몸이 움직이는 순간을 감지하다 보면 자비심까지는 모르겠지만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지고 감사한 마음이 우러난다.” 먹는 것이 치유의 과정이 되고 있는 것이지요.

‘김치밖에 없다’고 했지만 고구마 맛탕, 갓김치찜, 무찜 등 검박한 음식이 등장합니다. 주지 스님 몰래 나머지 사람들이 라면을 먹다 들키곤 화들짝 놀라는 장면도 나오지요.

◇작아지는 원망

일상에서 힘들었던 기억과 원망은 암자까지 따라왔습니다. “아부를 잘하는 사람은 그게 맞춤옷처럼 자연스러워서 자신도, 상대방도 아부를 하는지조차 모른단다.” “온세상이 원망스러운 때가 있다. 나를 낳은 엄마도, 잘한다 잘한다고 부추기던 상사도, 지지 않으려고 들볶던 나 자신도 원망했다.” “‘어서 나아야지’ ‘마음을 바꾸면 돼’라는 식의 남 말은 쉽다. 과로사 직전까지 가보고, 번아웃에 10년 가까이 시달리고 하는 소린지 궁금하다. 그냥 안아줄 수 없다면 바라보기만 해라.” “상대에게 진심어린 조언을 하고 싶다면 말 대신 돈을 주고 밥을 사줬어야 했다. 상대가 원하지 않는데 조언하는 건 꼰대나 할 짓이다.” 이런 생각이 불쑥불쑥 떠오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자신도 모르게 ‘감사합니다’란 말이 나오게 됐답니다.

'나를 살린 20일' 저자 진은섭씨가 촬영한 삼선암 강정 만들기 모습. 스님과 신도들이 사흘 동안 강정을 만들었다. /불광출판사

◇'강정 만들기’ 3일 대장정

20일 암자 생활의 대미는 ‘강정 만들기’가 장식합니다. 주지 스님은 직접 쌀 40킬로그램으로 조청을 만들고 밀양, 대구, 대전, 서울에서 원정 온 보살님들과 함께 사흘간의 강정 만들기 장정을 시작하지요. 한 보살님은 전화기로 ‘미스터 트롯’ 동영상을 틀고 주지 스님까지 모두 다 노동요 삼아 트롯을 흥얼거리며 조청과 튀밥, 땅콩, 율무, 해바라기 씨, 아몬드, 깨 등을 버무려 강정을 만듭니다. 함께 어울리는 행복을 맛보며 저자는 삼선암을 떠납니다.

해인사 삼선암에서 치유의 경험을 정리한 책 '나를 살린 20일' 표지. /불광출판사

◇다시 일상

일상으로 돌아오자 부기와 복부팽만도 돌아옵니다. 회사 생활은 떠나기 전과 똑 같은 쳇바퀴고요. 그렇지만 저자는 “현실은 그대로인데 예전만큼 버겁지 않다”네요. 울화, 짜증, 두통도 줄었고요. 저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물이 끓어 넘치기 전에 뚜껑 열 여유는 생긴 거다. 그러다 엎지르면? 뭐, 어쩔 수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