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가 또다시 ‘우리 편만 옳다’는 독선과 아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국민 갈라치기에 나선다면, 이른바 ‘K민주주의’는 더욱 퇴보하고 말 것입니다.”

최근 출간된 ‘우리 안의 파시즘 2.0′(휴머니스트)은 과거 민주화 운동의 주축이었던 586세대가 지금은 오히려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세력이 됐다는 점을 지적하고 성찰하는 책이다. 9명의 학자가 나눠 쓴 이 책의 편집자는 임지현(63·사학과), 우찬제(60·국문과), 이욱연(59·중국문화학과) 등 서강대 교수 세 명이다.

'파시즘 2.0' 편집자들이 새 정부에 바라는 것

“그때 제대로 성찰했더라면 지금 정치가 이 꼴 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죠.” 서강대 회의실에서 만난 임지현 교수가 말했다. 김대중 정부 집권 다음 해인 1999년, 임 교수는 계간 ‘당대비평’에 ‘우리 안의 파시즘’이란 글을 썼다. ‘정의를 독점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일부 좌파의 도덕적 폭력은 극우 반공주의와 결을 같이한다’는 지적이 ‘이적 행위 아니냐’는 반발과 논쟁을 촉발했다.

23년이 지난 지금은 어떻게 됐는가? 임 교수는 “좌파라는 사람들이 정작 인권과 정의(正義)에는 무심한 채 여전히 진영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반(反)혁명주의자를 ‘인민의 적’으로 규정하고 비판자를 억압한 옛 소련의 스탈린식 행태가 비친다는 것이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옳다’는 생각에 ‘조국 수호’ 같은 내로남불 사태가 벌어졌다. 냉전적 사고를 탈피하지 못한 채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니 ‘친미 국가가 되려 하는 우크라이나를 러시아가 혼내주는 것’이란 시각으로 보게 됐다는 것이다. “집권한 뒤에도 전체를 아우르려 하기보다 ‘토착왜구’ 같은 배제의 언어를 사용하는 걸 보세요. ‘너와 나 둘 중에 하나는 죽어야 한다’는 일상의 오징어 게임을 펼치는 겁니다.”

우찬제 교수는 “한국 사회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엄청나게 줄어든 지금, 일상에 스며든 작은 권력을 성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코로나 사태 이후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마스크 착용’이라는 안내문을 보고, 사고가 관료화·매뉴얼화된 것을 보여주는 우리 시대의 징표라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내일의 행복을 위해 무조건 현재를 희생시켜야 한다는 잘못된 목적지향적 사고방식은 군부독재 때와 똑 같은 패턴을 보이고 있다”고 했다. 여기에 ‘우리 편은 옳다’는 프레임까지 씌워지면 반성과 성찰 없이 무비판적으로 자기 편을 감싸는 행태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정치적 민주화와 사회·문화적인 비(非)민주화가 심각한 불균형을 이룬 세대가 바로 586″이라고 이욱연 교수는 지적했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대한민국을 이끌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유신 시대에 교육을 받아 권위주의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적 민주화를 이뤄낸 선구자라는 자의식 속에 여전히 수직적·차별적 사고방식이 존재하고 있다. 이 교수는 “하지만 나를 포함한 80년대 학번 세대는 이제 새 시대를 여는 첫 세대가 아니라 과거를 닫는 마지막 세대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이 편집한 책은 기득권을 지닌 엘리트 계급에게 유리한 시스템으로 변질된 능력주의(이진우), 586세대의 기득권이 청년·비정규직의 차별을 초래한 노동시장(이철승),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사고방식으로 대의민주주의의 원칙이 흔들리는 상황(박상훈) 등, 우리 사회 곳곳에 스며든 파시즘의 흔적을 꼼꼼하게 짚었다.

임지현 교수는 “박정희 시대에도 국민투표로 국민 의사를 묻는 절차는 있었고, 1990년대만 해도 영수회담을 통한 협치가 이뤄졌지만 지금은 그런 것조차 없이 상대를 적으로 몰아세우기 일쑤”라고 지적했다. 우찬제 교수는 “지금 정말 필요한 것은 파시즘적인 배제의 언어가 아니라 서로 소통이 가능한 대화의 언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