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중구 콘서트하우스 앞에 있는 국채보상운동 기념비.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1997년 IMF 사태 당시 전국민적 ‘금 모으기 운동’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모금운동이 20세기 초에 일어났다. 모든 한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국채보상운동(國債補償運動)이다. 1907년 대구를 중심으로 민족 지사들이 앞장섰던 이 운동은 “남자는 담배를 끊고, 여자는 비녀와 가락지를 내 나랏빚을 갚자!”는 구호로 전국의 많은 사람들을 동참시켰다.

당시 한국 경제를 일본에 예속시키려 했던 일제는 대한제국 정부가 차관을 도입하도록 했다. 1905년 6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4차례에 걸쳐서 한국의 관세수입을 담보로 일본 흥업은행으로부터 1000만원을 빌리는 것이었다. 연 이자율 6.6%의 고리에 5년 거치 후 5년 상환, 그나마 100만원을 일본이 선이자로 가로채는 악성 차관이었다. 거기에 차관의 사용 역시 통감부가 임의로 정하는 것이어서 한국 정부는 돈을 구경도 하지 못했다. 차관액은 1907년 1300만원으로 늘었고, 사용처는 은행과 회사에 나눠 주거나 수도국과 위생 비용, 심지어 일본 유학생 비용도 있었다.

1300만원을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 대체로 3300억원 정도로 보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당시 1원은 지금 돈으로 약 2만5000원 정도로 볼 수 있게 되는 셈이다. 1906년의 대한제국 세입 총액은 1318만원 정도였다. 한마디로 국가예산과 맞먹는 금액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통감부는 한일강제병합 이전까지 계속 일본의 차관을 들여와 1910년에는 총액이 4400만원을 넘었다. 현재 가치로 1조원을 훌쩍 넘는 돈이다.

그래도 1907년 2월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됐을 때의 목표액은 ‘1300만원을 갚자’는 것이었다. 고관과 양반으로부터 농민·상인·승려·인력거꾼까지 참가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전국에 30여 개 부녀자 단체가 생겨나 가락지와 패물까지 모았다. 한 대구 기생이 1000원(현재 가치 약 2500만원)을 선뜻 내놓는 일도 있었다. 의연금을 지니고 산을 넘던 관계자가 산적을 만났는데, 사정을 들은 산적들이 강도질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산채로 되돌아가 재물을 내놨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있다. 방대한 국채보상 관련 기록문은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그럼 과연 국민들의 피땀어린 성원으로 모인 금액은 모두 얼마나 됐을까. 최근 대한매일신보를 둘러싼 당시 네 건의 국제재판을 연구한 학술서가 출간됐다. 언론사 분야의 원로 정진석 한국외대 명예교수의 ‘네 건의 역사드라마’(소명출판)다, 정 교수는 여기서 1908년 7월 27일 주한 일본헌병대가 내사해 집계한 자료를 분석했다. 신문사와 기성회 등 여러 단체별로 모은 성금의 액수가 여기에 나온다.

정진석 교수의 연구서 '네 건의 역사드라마'.

대한매일신보 3만6000여원, 대한매일신보사 내 총합소 4만2308원 10전, 황성신문 8만2000여원, 제국신문 8420원 6전, 만세보·대한신문 359원, 국채보상기성회 1만8700원 22전 7리. 총계는 18만7787원 38전 7리. 정진석 교수는 “여러 자료와 상황을 종합하면 전체적인 모금 총액이 20만원이 넘지 못했던 것은 확실하고, 16만원에서 19만원 정도였을 것으로 추산된다”고 했다. 위의 기준에 따라 현재 금액으로 환산하면 40억원에서 48억원 정도가 된다. 물론 큰 금액이었지만 안타깝게도 1907년 기준 차관 1300만원의 1.5%를 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국채보상운동이 급격히 동력을 잃게 된 것은 성금 모금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던 민족지 대한매일신보에 대한 모함과 탄압 때문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1908년 7월 통감부는 국채보상기금을 횡령했다는 혐의로 대한매일신보의 대표 언론인 양기탁을 구속해 재판에 회부했다. 재판 말미에 일본인 검사가 “피고에 대해 무죄 언도가 있기를 바란다”고 털어놨을 정도로 이것은 무리한 재판이었고, 모함을 받았던 양기탁은 곧바로 출감했다.

그러나 정진석 교수는 “이것은 대한매일신보의 사장이었던 영국인 배설(어니스트 토머스 베델)의 실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배설은 독자들이 신문사에 기탁한 국채보상운동 기금을 운용하기 위해 미국계 금광 회사 콜브란의 주식을 매입하고, 서울에서 호텔을 운영하던 프랑스인 마르탱에게 자금을 대여했던 사실이 재판 과정에서 밝혀졌다. 한국의 항일 투쟁을 옹호하는 신문을 발행하며 일본과 영국 양쪽으로부터 탄압을 받던 배설이었지만, 이 자금 운용 때문에 ‘국채보상운동 기금을 횡령한 게 사실 아니냐’는 오해를 받았고, 결과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의 열기에 찬물을 끼얹은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재판이 끝난 뒤 의연금처리회가 구성됐고 양기탁은 “각 지방에 다시 돌려줘 키워나가다가 국가에 필요한 때가 오면 일시에 다시 내놓도록 하자”고 제안했으나, 배설이 1909년 5월 36세의 나이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난 뒤 신문사는 일제에 매각됐다. 운동을 주도했던 유지들은 1909년 11월 ‘국채보상금처리회’를 결성해 기금을 어떻게 할 것인지 논의했다. 학교를 설립하자는 주장과 식산(殖産) 진흥, 은행 설립 등 여러 의견이 나왔으나 실행하지 못하던 중 1910년 8월 강제 합병이 이뤄졌다.

그러면,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16만~19만원, 현재 가치 환산 40억~48억원이라는 모금액은 도대체 이후 어떤 운명을 맞게 됐던 것일까?

이 문제는 지금껏 제대로 알려진 적이 거의 없다. 인터넷으로 확인 가능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두산백과’ ‘위키백과’ ‘나무위키’의 ‘국채보상운동’ 항목은 모두 ‘일본의 방해로 실패했다’고만 썼을 뿐, 정작 그 돈이 향후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 부분이 정 교수의 이번 책(416쪽)에 서술돼 있다.

“(강제 합병) 3개월 후인 1910년 12월 12일 총독부 경무총감부는 기금을 모두 압수했다. 총독부가 빼앗은 금액은 ‘국채보상금처리회’의 교육기본금관리회가 관리 중이던 9만여원과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의 4만2000원이었다. ‘국민의 핏방울’이요, 애국심이 결집된 ‘고혈(膏血)’이었던 성금은 허무하게도 일제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근거는 매일신보 1910년 12월 15일자 기사 ‘국채보상금 처분’이었다.

일제는 조선 민중이 나라 빚을 갚으려고 십시일반 모아놓은 돈마저 갈퀴로 긁어내듯 빼앗아갔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남는다. 일제가 빼앗은 국채보상운동 기금은 총합 약 13만2000원(현재 가치 약 33억원)이었다. 그런데 불과 2년 전 상황에서 그 기금 규모는 16만~19만원(현재 가치 약 40억~48억원)이었다. 최소 2만8000원(현재 가치 약 7억원), 최대 5만8000원(현재 가치 약 14억~15억원)의 돈이 비는 것이다.

어떻게 된 것일까. 정진석 교수에게 물어봤다.

정진석 교수가 서울 강남구 현대고에 마련된‘정진석 언론사료실’에서 새 연구서를 들고 있다. /박상훈 기자

“일제가 그 돈을 강탈하기 위해 수색했을 시점에 이미 나머지 돈은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진 상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디로 간 걸까요.”

“그것까지는 알 수 없는 일이죠.”

남은 돈의 행방은 추적할 수 없게 됐다. 100년도 훨씬 넘게 지난 일이다. 다만 사라진 그 돈이 독립운동이나 교육 사업 같은 좋은 일에 사용됐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