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조계종 신임 종정(宗正) 스님에 추대된 통도사 방장 성파스님(가운데)이 13일 서울 종로구 조계사 대웅전에서 열릴 고불식 행사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뉴시스

‘서운암(瑞雲庵) 된장 스님’이 조계종 최고 어른인 종정(宗正)이 됐다. 대한불교조계종 원로의원과 총무원장, 중앙종회 의장 등 20여 명으로 구성된 종정 추대위원회는 13일 오후 서울 조계종 총무원에서 비공개 회의를 갖고 제15대 종정에 통도사 방장(方丈) 성파(性坡) 스님을 추대했다.

성파 스님은 선원(禪院)에서 참선 수행으로 평생을 살아온 과거 종정들과는 다른 삶의 궤적을 보였다. 성파 스님은 1960년 통도사로 출가해 초기엔 선원에서 참선 수행에 정진했다. 운명이 바뀐 것은 1980년 신군부에 의한 10·27법난(法難). 그는 “그때까지 조계종 행정을 담당하던 스님들이 일거에 신군부에 의해 밀려나면서 행정 공백을 메우기 위해 선방(禪房)에서 나오게 됐다”고 했다. 총무원 사회·교무부장과 통도사 주지 임기까지 마쳤을 당시 성파 스님은 40대 중반이었다. 성파 스님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 큰 사찰의 주지까지 지낸 입장에서 종단의 다른 직책을 맡기는 어색했다”고 했다. 새 길을 모색하게 된 계기다. 스님은 당시를 ‘출출가(出出家)’라고 표현한다.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출가 당시 마음을 다시 새긴 진정한 출가라는 의미다.

조계종 새 종정(宗正)에 추대된 성파스님이 13일 서울 종로구 조계사 대웅전에서 부처님께 참배하고 있다./뉴시스

그는 이후 통도사의 암자인 서운암을 중심으로 전통 문화 보존과 보급에 나섰다. 첫 걸음은 항아리(옹기) 수집과 된장·간장 담그기. 그는 “1980년대 아파트 붐이 불면서 골목마다 버려진 항아리가 굴러다녔다”며 “청자·백자는 왕족·귀족이 썼지만 항아리는 귀천(貴賤)을 불문하고 우리 민족과 함께해온 기물인데 버려지게 둘 수는 없어 모으게 됐다”고 했다. 항아리를 5000개쯤 모았을 때 일본에서 간장·된장이 수입된다는 뉴스가 나왔다. 그는 “왜정(일제강점기) 때 그 고생을 했는데 간장·된장까지 일본 것을 먹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모아둔 옹기를 이용해 된장·간장을 담가 판매했다. 그렇게 시작한 ‘서운암 된장’은 서운암의 트레이드마크가 됐고, 신자들 시주에만 의지하지 않고 사찰 살림을 꾸려갈 수 있는 자산이 됐다. 스님은 이후로도 옻칠, 도자기, 한지(韓紙) 제작 등으로 영역을 넓혔다. 사찰 내에서 그의 활동은 기행(奇行)으로 비칠 수도 있었다. 그는 그러나 “효율과 기능이 강조되는 시대에 과거 건축⋅공예⋅미술의 중심이었던 사찰의 역할을 현대적으로 되살리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했다. 2018년엔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어 ‘불보(佛寶)사찰’로 불리는 영축총림 방장에 취임해 통도사 스님들의 수행을 지도해왔다.

조계종 새 종정으로 추대된 성파 스님이 지난 5월 도자기판으로 구워낸 16만 대장경 사이에 섰다. 해인사 8만 대장경은 앞뒤로 판각돼 있는데, 도자기판은 앞면만 대장경 내용을 새겨 2배인 16만 대장경이 됐다. 성파 스님은 도자기, 옻칠, 한지 등 전통문화를 보존, 보급하는 데 앞장서왔다. /김동환 기자
통도사 서운암 앞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장독 앞에선 성파 스님. 스님은 1980년대부터 버려진 장독을 수집해 간장 된장을 담갔다. /김동환 기자

성파 스님은 지난봄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본지 인터뷰에서 ‘경청(傾聽)’의 가치를 강조했다. ‘젊은이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묻는 질문에 그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했다. “왜정과 6·25 전쟁을 다 겪은 우리 나이 사람들은 ‘우리 때보다 훨씬 좋아졌는데, 뭘 이 정도를 가지고...’라고 말합니다. 그래선 해답이 없지요. 청년들의 어려움에 귀 기울이면 그 안에 해답도 있을 것입니다.”

수행(이판)과 행정(사판)을 모두 경험한 성파 스님은 “이판과 사판은 ‘지혜’와 ‘행동’”이라며 “혜(慧) 안에 행(行)이 있고, 행 안에 혜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종정으로서 ‘서운암 된장 스님’의 향후 행보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