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12월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정학모 신부(가운데 흰옷 입은 사람)의 사제서품식에 참석한 가족들. 앞줄 어린이가 당시 여섯살인 정웅모 신부, 정 신부 왼쪽이 어머니, 뒷줄 맨왼쪽이 아버지. 어머니는 두 형에 이어 막내(정웅모 신부)가 사제가 되자 항상 "와 이래 안 늙노?"라고 기도했다. /정웅모 신부 제공

종교인들을 취재하면서 부모님 사연을 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직자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본인으로서는 일생일대의 결단이지요. 그렇지만 모두 가족들의 축복 가운데 성직자가 되는 건 아닙니다. 특히 부모님들은 이런저런 걱정이 많지요. 때론 반대도 극심하고요. 찬성했건 반대했건 부모님들은 결국 자식의 뜻을 존중했답니다. 그뿐 아니라 자식이 올바른 성직자의 길을 걷도록 평생 기도하셨다지요. 감명 깊게 들었던 성직자들의 부모님 사연을 정리했습니다.

정웅모 신부가 1987년 2월 사제서품식 후 명동성당 마당에서 큰형 정양모 신부에게 강복하고 있다(왼쪽). 정웅모 신부는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 덕분(?)인지 일찍 반백이 됐다. /정웅모 신부, 김지호 기자

◇”와(왜) 이래(이렇게) 안 늙노?”

천주교 서울대교구 홍보위원회 성미술담당 정웅모(64) 신부님의 어머니는 이 말씀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합니다. 정 신부는 ‘형제 신부 집안’ 출신입니다. 8남매 중 큰형님(정양모 신부)과 둘째 형님(정학모 신부)에 이어 막내인 정웅모 신부까지 3명이 사제가 됐지요.

정 신부님 가족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 집안입니다. 경북 상주(尙州) 출신으로 정식 성당이 아닌 공소(公所·경북 함창본당 목가공소)에서 신앙생활을 했답니다. 상주(常住)하는 사제가 없는 공소여서 1년에 2번 독일 출신 사제가 오토바이를 타고 찾아와 미사를 드렸다지요. 그렇지만 신심(信心)만큼은 엄청나게 독실했다지요. 그런 집안에서 마을에서 첫 사제가 탄생한 데 이어 3형제가 사제가 됐으니 부모님은 얼마나 기쁘고 자랑스러웠을까요. 그러나 한편으론 사제 생활의 어려움 역시 잘 알고 계셨기에 걱정도 많으셨을 겁니다. 정 신부님의 형님 두 분은 1963년 12월에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큰형님 정양모 신부님은 독일에서, 둘째 형님 정학모 신부님은 명동성당에서 사제서품식을 가졌지요. 어머니는 두 아들이 같은 날 사제품을 받기를 간절히 기도하셨는데, 결과적으로 정학모 신부님은 12월 20일, 형인 정양모 신부님은 12월 21일에 사제품을 받으셨다네요.

항상 형님 신부님들의 올바른 사제 생활을 위해 기도하던 어머니는 큰형과 22살 터울인 막내(정웅모 신부)가 사제가 되겠다고 했을 때도 걱정이 앞섰다고 합니다. 신학생, 부제, 보좌신부, 주임신부를 하면서 겪을 어려움과 유혹 등을 생각하면서 기도하셨지요. 그런 어머니는 정웅모 신부님을 만날 때마다 머리카락을 보면서 “와 이래 안 늙노?”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아무래도 나이가 들면 관록이 생겨 어려움과 유혹도 적어질 것이라 생각하셨던 모양이지요. 어머니는 치매 기운이 있을 때에도 정 신부님의 얼굴을 어루만지면서 똑같이 “와 이래 안 늙노?”라고 하셨답니다. 덕분(?)인지 정 신부님은 일찍부터 동기 신부들보다 새치가 많았답니다. 본인 말로는 “일찍 늙어버렸다”고 하지요. 그런데 희한하게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새치 증가 속도도 딱 멈추었답니다. 정 신부님은 “지금 반백인데, 어머니 돌아가신 후로는 새치가 늘지 않았다. 생전에 어머니가 머리카락 빠지라고 기도하셨으면 아마 대머리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어머니의 기도란 이렇게 간절한 것”이라며 웃으셨습니다.

손인웅 목사의 부모님(왼쪽). 유교 집안이었지만 아들이 목사가 되겠다고 하자 부모님은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대한기독교서회, 이태경 기자

◇”어르신, 모자 벗으세요” 유교와 개신교의 충돌(?)

최근 회고록을 펴낸 손인웅(80) 덕수교회 원로목사님은 경북 군위의 유교 집안 출신입니다. 목사님 형제가 9남매인데, 교회 다니는 사람은 어릴 적부터 손 목사님 혼자였답니다. 초등학생 시절, 동네 교회 종소리에 이끌려 혼자 교회를 다녔다고 합니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 고학(苦學)으로 경북대 사대를 졸업한 손 목사님은 부모님의 기대와 달리 교사가 아닌 목회자의 길을 선택합니다. 군 장교로 있던 형님이 신학대학원 입학금을 내줬다고 합니다.

경주 손씨 집성촌(集姓村)이었던 마을에서 손 목사님 부친은 문중의 어른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제사도 많았지요. 교회에 다니던 손 목사님은 집안 제사 때면 눈에 띄지 않게 뒷줄에서 두 손 모아 기도하면서 절을 대신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부친께 회초리를 맞기도 했지만 교회 출석은 멈추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막상 손 목사님이 신학대학원을 다니고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 분명해지자 부모님이 변했다고 합니다. 예배에 출석하신 것이죠. 아버지는 “이왕 하는 거라면 열심히 하라”고 하셨고, 어머니는 세례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아들이 선택한 길이니 부모로서 응원한다’는 뜻이었겠지요. 예상치 못한 불상사(?)도 있었다지요. 고향 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는데, 부친은 평소보다 더 신경을 써서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참석했답니다. 그런데 강사로 초빙된 부흥사가 “거기 어르신 모자(갓) 벗으세요”라고 했다지요. 기분이 크게 상한 부친은 집에 돌아와 “기독교는 예의범절도 모르는 종교”라며 한동안 교회 출입을 끊기도 했답니다. 손 목사님은 “유교와 개신교가 만나는 현장이었다”고 했습니다. 손 목사님이 이번에 펴낸 회고록 주제를 ‘기독선비’로 삼은 것도 이런 배경이 영향을 미친 듯합니다. 개신교와 유교의 장점을 서로 배워 접목해 더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자는 의미이겠지요.

손 목사님의 부친은 임종 전에 세례를 받고 하늘나라로 가셨답니다. 아버님뿐 아니라 손 목사님 집안에서는 이후로 목사 2명, 장로 1명, 권사 5명, 안수집사 1명, 서리집사 40명 등 50여명이 개신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보각 스님이 대학 졸업식에서 어머니와 함게 촬영한 사진(왼쪽). 보각 스님은 "항상 어려운 이를 돕는 어머니를 보며 사회복지의 씨앗을 키웠다"고 말한다. /불광출판사, 오종찬 기자

◇”중도 소도 아닌 사람은 되지 마라.”

올해 만해실천대상을 수상한 자제공덕회 이사장 보각(67) 스님은 출가하겠다고 아뢰자 아버님의 반응이 이랬다고 합니다. 전남 나주 출신인 스님은 아버지가 49세에 얻은 귀한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스님은 중고교학생 때부터 불교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출가의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결국 고교를 졸업한 후 18세 때 출가 결심을 부모님께 말씀드렸다지요. 그랬더니 유학을 공부했던 아버님은 “불도(佛道)도 도(道)이니 말리지 않겠다”며 ‘중도 소도 아닌 사람은 되지 마라’고 하셨답니다. ‘중도 소도 아니다’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라는 뜻의 속담이지요. 보각 스님은 아버님의 이 말씀을 ‘중[僧]도 속(俗)도 아닌 사람으로 살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여 출가 수행생활에 더 매진했답니다.

유학을 공부한 아버지로서는 귀한 아들이 출가한다는 사실이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불도도 도’라며 이렇게 허락하신 것이지요. 그렇게 출가한 스님은 한국 현대 불교사회복지의 선구자로 평가받습니다. 스님은 어머니에 대해선 ‘사회복지로 발을 들여놓게 만들어준 분’이라고 합니다. 스님은 대표적으로 ‘빨간 내복’ 에피소드를 자주 말씀합니다. 추운 겨울날 광주로 중학교 입학시험 치러 가던 날, 어머니는 자신의 빨간 내복 상의를 아들에게 입혀주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던 중, 거지 모녀가 탔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빨리 내복 벗어라” 했답니다. 스님은 당황하고 부끄러웠지만 어머니 말씀에 순종해 빨간 내복을 벗어 거지 여성에게 건넸다고 합니다. 버스 안에서 박수가 터져나오고 여기저기서 “착하다” “시험 꼭 붙을 거다”란 격려가 이어졌다지요. 정 많고 어려운 이를 보면 그냥 넘어가지 못한 어머니를 보면서 자란 그에게 불교사회복지는 어쩌면 당연한 코스였는지 모릅니다. 스님의 은사인 천운 스님도 “자네 어머니만큼만 살면 잘 사는 거다”라고 하셨다지요. 천운 스님도 절에서 고아들과 함께 생활하며 공부시키는 등 지금으로 보면 사회복지를 실천한 분이었다고 합니다.

정리하고보니 엄부자모(嚴父慈母) 사례가 많네요. 아마도 60대 이상 종교인들이 성직의 길로 들어설 당시 사회 분위기와도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위의 사례에서 보듯이 종교인들은 성직자로서 진로를 결정했을 때 부모님의 반응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초심(初心)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성직자뿐 아니라 우리 모두는 부모님 기도에 힘입어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