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연(정의기억연대)은 위안부 할머니를 돕는다는 단체인데 자기들이 마치 희생자인 것처럼 행동하고 비판을 금지한다. 전형적인 피해자 코스프레 아닌가.”
임지현(62) 서강대 교수는 24일 일본군 위안부 단체를 비판해도 최고 5년형을 살린다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법’ 개정안 뉴스가 알려지자 황당해했다. 임 교수를 며칠 전 인터뷰했는데, ‘윤미향·정의연 보호법’ 때문에 이날 다시 전화를 걸었다.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는 희생자가 아닌 사람들이 선대의 희생자 지위를 물려받아 희생자를 자처하면서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한다. 정의연은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정치적으로 오용하고 도구화시킨 전형적 사례다. 오죽하면 위안부 할머니 이용수씨가 ‘내가 밝힌 정대협 진실도 위법인가’하고 라며 반발하겠나.”
임 교수는 ‘일상적 파시즘’과 ‘대중독재’라는 개념으로 한국 사회에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킨 서양사학자다. 파시즘이 보통 사람들의 일상에 깊숙이 침투해있고, 파시즘에 반대한다는 진보 진영도 파시즘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분석은 지식인 사회를 들끓게 했다.
이번엔 600쪽 넘는 저서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다. 홀로코스트와 식민주의 제노사이드, 스탈린주의 테러를 겪은 이스라엘과 폴란드, 한국 등에서 자기 민족을 희생자로 인식하고 도덕적 정당성을 내세우는 ‘희생자의식 민족주의’(휴머니스트)를 10여년간 추적한 지적 작업이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을 분석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세습적 희생자의식’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21세기 민족주의를 해석하는 이론으로 발전시켰다. 문제는 2차대전 가해자인 독일과 일본도 드레스덴 폭격과 히로시마 원폭 피폭을 앞세워 희생자를 자처하면서 도덕적 정당성을 주장한다는 사실이다. 임 교수는 “세계는 지금 세습된 희생자의식을 통해 현재 자신들의 민족주의에 도덕적 정당성과 정치적 알리바이를 부여하는 ‘기억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요코 이야기’를 거짓으로 몰았어야 할까
-2007년 ‘요코 이야기’논란이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고 썼다.
“일 제국주의 희생자는 우린데, 한국인이 가해자로 등장하는 ‘요코이야기’는 당혹스러웠을 법하다. 그 책이 일제 식민지배라는 맥락을 제거하고 일본 민간인이 패전 후 귀환하면서 겪은 학대만 적은 건 문제다. 하지만 ‘요코 이야기’를 거짓말로 몬 것은 심했다. 전후 일어날 수 있는 일 아닌가. 아시아 역사 문제에 소홀한 미국 교육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세련되게 갔어야지 거짓말로 몰면 ‘한국의 민족주의는 역시 못말린다’는 역효과를 낼 수밖에 없다.”
-2차대전 직후 귀환하던 일본인 중 만주에서 11만명, 한반도에서 1만8000명이 기아와 질병, 학대로 숨졌다고 썼다.
“동유럽에서 귀국한 독일계 피난민 1200만명 중 50만명~200만명이 소련과 동유럽 주민의 보복과 학대로 사망한 것에 비하면 적다. 하지만 개인 차원에서 보면, 내 가족의 죽음은 숫자보다 훨씬 중요하다. 이 민간인들은 일본 정부가 사실상 방치했다. 소련군의 성폭력과 약탈, 일부 조선인의 복수와 폭력은 ‘요코이야기’뿐 아니라 다른 민간인 귀환자들도 흔히 겪은 일이다.”
◇마을 이웃 유태인 1600명 학살한 폴란드 예드바브네의 책임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뭐가 문제인가.
“세습적 희생자로서 자기 기억만 옳고 상대방 기억은 배제한다. 개인의 행위에 상관 없이 자기 민족이 희생자이기 때문에 ‘집합적 무죄’를 주장해 면책을 받으려한다. 폴란드 예드바브네 유대인 학살의 주범인 라우단스키 삼형제가 그랬다. 이들은 나치 점령군이 학살 주범이었고, 소련과 공산정권 당시는 ‘유대인 빨갱이’가 폴란드인을 탄압했다고 주장했다.”
폴란드 출신 유대계 역사학자인 얀 그로스는 2000년 예드바브네 학살을 다룬 ‘이웃들’을 폴란드어로 출간했다. 1941년 7월10일 3000명이 사는 폴란드의 작은 마을 예드바브네에서 1600명의 유대인이 폴란드인 이웃들에게 학살당한 사건을 폭로한 것이다. 전 국민 20% 정도가 나치 독일에 희생된 폴란드인이 실은 유대인 학살의 주범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치열한 역사논쟁이 벌어졌다. 학살 주범인 라우단스키 형제는 공산정권 때 각각 15년과 12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희생자의식 민족주의가 부각된 계기는 뭔가.
“2차대전 직후엔 연합군이나 이스라엘은 영웅주의가 압도적이었다. ‘우리가 이겼다’ ‘국가 건설에 나서자’ 이런 분위기였다. 희생자의식이 기억문화 전면에 대두된 것은 인권이 점점 중요해지면서다. 신문을 뒤져보면 알겠지만, 우리도 예전엔 을지문덕, 이순신 같은 민족 영웅을 부각시켰는데, 지금은 일본군 위안부가 민족주의의 상징이 됐다. 그래야 국제 사회의 호응을 받는다. 1990년대 보스니아 내전 당시 인종 청소와 성폭력 현장이 CNN 생중계로 생생하게 보도되면서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예민해졌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국제적으로 공감을 얻은 데는 보스니아 내전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경력 오점 클수록, 더 극렬…김원웅을 보라”
-해방 76년이 넘었는데 ‘친일파 청산’ 주장이 끊이지 않는 것도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와 상관있나.
“최근 논란을 빚은 김원웅 광복회장을 보면, 폴란드 라우단스키 형제를 비유한 ‘작은 물고기’가 떠오른다. 시류에 영합하면서 ‘그물’을 피해다니는 기회주의자를 말한다. 라우단스키 형제의 둘째는 소련군 진주 때는 소련 비밀경찰 정보원으로, 나치 점령기엔 나치에 동조해 유대인 학살에 가담했고, 공산 정권이 들어서자 열렬한 공산주의자가 됐다. 김원웅씨는 유신 때 공화당, 신군부때는 민정당에서 일했는데 생계 때문에 어쩔 수없었다고 얘기하고, 지금은 친일청산을 부르짖는다. 자기 경력에 오점이 있는 사람일수록 더 과격하고 극렬한 언어를 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물론 정의기억연대(옛 정대협)같은 위안부 단체를 비판해도 감옥에 가는 법안이 발의됐다. 할머니들을 위한 후원금을 유용한 혐의로 재판중인 정의연 이사장 출신 윤미향 의원까지 앞장섰다.
“정의연의 태도는 일본 우익들이 1853년 페리 제독의 흑선(黑船) 도래 이후, 일본이 제국주의의 피해자였다는 프레임을 만들고 자기들의 공격적 민족주의를 정당화하는 것과도 유사하다. 무엇보다 정의연은 박원순 사태때 어떤 입장이었나. 여성 인권을 위한다면 가장 분노해야 할 곳이 정의연 아닌가.”
-작년 12월 통과된 ‘5.18 역사왜곡 처벌법’(5.18 특별법)에 이어 역사왜곡을 막는다며 학문과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법안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폴란드 극우정권이 2018년 폴란드 민족이 나치의 홀로코스트 공범이라거나 책임이 있다는 주장을 펴면 처벌하는 ‘기억법’을 만들었다. 하지만 EU에 의해 제동이 걸려 시행되지 못했다. 어떻게 자칭 진보라는 문재인 정부가 학문·사상을 통제하는 법안을 양산하나.”
◇해방 76년인데, 아직도 ‘희생자’ 연연
-홀로코스트와 식민주의 제노사이드와 함께 스탈린주의 테러가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만든 요인으로 꼽힌다. 최근 ‘미군 점령군, 소련군 점령군’논란을 어떻게 보나.
“‘해방전후사의 인식’의 틀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얘기다. 한국 사회가 냉전의 포로로 남아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민주화 이전엔 소련·좌익의 학살만 부각하고, 군·경찰·우익의 학살은 억눌러왔는데, 이젠 반대로 소련·좌익의 학살 기억은 억누르고 군경·우익의 학살만 부각시킨다. 스탈린주의 테러는 1950년대부터 서독에서 제기했지만 사회주의 붕괴 이후 동유럽에서 본격적으로 분출됐다. 동구권에서 스탈린과 공산정권 테러에 대한 기억은 최근까지 직접 겪은 일이니까 더 직접적이고 생생할 수밖에 없었다. ‘김일성 정권’이 끝나면 스탈린주의 테러 실상이 드러날지도 모르겠다.”
-우린 끊임없이 일본 식민지배에 대해 사과와 반성을 요구한다.
“한국은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다. 말로는 늘 선진국에 진입했다고 하면서 ‘희생자’ 지위에 연연한다. 문제는 일본도 자신들이 서양 제국주의의 희생자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일본의 ‘희생자의식’을 깨는 게 중요하다.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한국이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에서 벗어나면, 일본에 다시 충격을 줘서 틀을 흔들 수있지 않을까.”
B·C급 전범으로 사형 또는 중형을 받은 조선인 포로감시원을 “지시에 따랐을 뿐인데 억울하다”고 무조건 옹호한다거나 1930년대 ‘만보산 사건’이 야기한 화교 학살을 제대로 성찰하지 않는다는 임 교수의 비판은 통렬하다.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는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와 동유럽의 경험을 토대로 ‘지구적 기억구성체’를 설명하는 독자이론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학문적 의미가 크다. 물론 이론이 현실을 충분히 설명하느냐는 세월의 비판을 통과해야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