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 노멀 시대엔 새로운 형태의 공산주의가 필요하다. 이는 재난 자본주의의 해독제로 쓰일 ‘재난 공산주의’ 같은 것이다.”
‘철학계의 엘비스 프레슬리’로 불리는 슬로베니아 출신 스타 학자 슬라보예 지젝(71) 류블랴나 대학 선임연구원은 몸이 좋지 않다며 연신 콧물을 훔치고 눈을 비볐다. 지난달 10일 화상 앱 줌으로 그를 만났다. 21세기를 대표하는 마르크스주의자인 지젝은 지난 7월 출간한 ‘팬데믹 패닉’(북하우스)에서 “국가가 훨씬 더 적극적인 역할을 떠맡아 마스크, 진단키트 같이 긴급하게 필요한 물품들의 생산을 조정하고, 실직한 모든 사람의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하는 등의 조치를 수행해야 함은 물론, 이 모든 일을 시장 메커니즘을 버려가며 해야 한다”고 썼다.
-여러 분야에서 ‘뉴 노멀’을 이야기한다.
“우려스럽게도 ‘뉴 노멀’은 내전(civil war) 같은 것이다. ‘무엇이 뉴 노멀이 될 것인가’란 문제는 거대한 정치적 투쟁이다. 포퓰리스트 보수주의자들은 ‘뉴 노멀’에선 우리 중 누군가는 바이러스로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빌 게이츠와 같은 디지털 전문가들은 ‘뉴 노멀’에선 훨씬 더 급진적인 디지털화가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집에 머무르면서도 디지털로 커뮤니케이션하게 하는 기술의 필요성을 이야기한다. 나는 이러한 전망도 유효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격리가 가능하지만, 그들을 위해 음식과 물품을 배달해줘야 하는 사람들은 안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몇몇 나라에선 제3의 버전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점점 나아지고 있는 한국, 대만, 호주, 베트남, 뉴질랜드처럼 이 위험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이들의 완전한 연대(full solidarity)가 가능한 곳 말이다.”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없나.
“인간 본성에 어긋난다며 사회적 거리 두기와 마스크 쓰기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이해한다. 그렇지만 우리 삶이 매우 급진적으로 변하고 있으므로 우리의 행동도 급진적으로 변해야 한다. 라틴 아메리카, 북아메리카, 서유럽은 공포에 질려 있다. 격리가 다시 시작됐고 끝날 기미가 없다. 사람들은 아직도 ‘올드 노멀리티(old normality)’가 돌아올 일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다.”
-환경을 파괴하고 이윤만 추구해온 자본주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는 전망도 있다.
“빌 게이츠처럼 지적인 기업인조차 우리가 알고 있던 자본주의는 끝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훨씬 강한 국가, 훨씬 강한 국제적 협력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통상의 시장 메커니즘으로 전염병과 싸울 수 없다. 미국조차도 완전히 반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직접 돈을 주고 있다. 도발적이지만, 나는 이를 ‘새로운 공산주의’라 명명한다. 북한이나 중국과는 관계없는 일이다.”
-코로나 방역을 이유로 정부의 역할이 커지면서 민주주의를 위협한다는 전망도 나온다.
“내가 뉴스를 제대로 본 게 맞는다면 한국에서는 누군가 확진되면 그 사람의 동선을 추적할 수 있다. 유럽 국가들에서는 추적하지 않는다. 우리 정부도 ‘만일 확진되면 사람들과 모이지 말고, 집에 머무르며, 의사에게 가라’고만 한다. 많은 사람들이 구(舊)공산주의의 통제 상태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매우 슬픈 일이다. 인구 200만명 국가에서 거의 매일 100명 가까이 확진되는데도 확진자들이 같이 있었던 사람들의 명단을 국가에 제공하길 거부한다. 통제 체제를 확립하는 것이 오늘날의 과업이다.”
-한국에서는 정부가 ‘코로나 방역’을 이유로 반정부 시위를 막기도 한다.
“슬로베니아에서도 정부가 코로나를 반정부 운동을 저지하기 위한 핑계로 이용한다. 그렇지만 국가의 통제가 진짜 위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말로 무서운 건 우리 일상에 스민 디지털 통제다. 이는 코로나 이전부터 시작됐다. 미국에선 비밀경찰이 전화와 이메일을 검열한다. 이스라엘에선 20년 전부터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더라. 그런 상황에서 코로나 방역을 위한 물리적 통제로 자유를 위협받는다고 말하는 건 위선적으로 보인다. 정말로 필요한 것은 바이러스 확산을 제한하기 위한 비교적 간단한 통제다. 당신이 누구와 사는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같은 사적인 정보가 필요한 게 아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인간 문명은 어떤 변화를 맞게 될까.
“산업혁명은 시장지배적인 자본주의를 만들었다. 그 시대가 한계에 다다랐다. 앞으로는 디지털 전체주의가 지배할 것이다. 우리는 디지털 메커니즘에 의해 어느 때보다 더 사회적으로 통제되고 있다. 우리 모두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고 있지만, 영적(靈的) 고독은 확보받지 못한다. 진정으로 혼자가 된다는 건 아주 어렵다.”
-코로나로 인한 경제적 위기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기억하라. 두 달 전, 우리는 영국과 미국이 전대미문의 경제적 위기에 처해 있다는 걸 배웠다. 실업률은 높은데 주식은 가파르게 올랐다. 이건 역설이다. 더 이상 시장이 생산성을 증명하며, 기업이 잘돼 이익이 많으면 주가가 올라가는 구자본주의가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식시장이 실제 경제적 생산성과는 괴리돼 있는 시대, 투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 넷플릭스는 거의 ‘포스트 자본주의’ 기업이다. 수백 개 영화를 만들면서 돈을 잃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새로운 시리즈를 항상 만들면서 아직도 발전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알던 방식의 자본주의에서 벗어나고 있다.”
-교육의 질적 저하도 우려한다.
“줌 교육은 팬데믹의 가장 큰 재앙 중 하나다. 서유럽에선 이 문제가 사회적 위기로 대두되고 있다. 어린이와 10대들의 정서가 파괴되고 있다. 코로나 사태에 적합한 교육의 장을 아직 찾지 못했다. 학교에 가는 건 사회적 대면의 예의, 책임, 친구를 어떻게 대하는지 배우기 위해서다. 그 모든 것이 유예됐다는 것이 끔찍하다.”
-코로나 이후 당신에게 생긴 가장 큰 변화는?
“더 이상 여행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낙원은 학회차 해외로 떠났는데 뭔가 착오가 생겨 회의가 다 취소되고 혼자 외국 대도시에 3~4일 있게 되는데 아무도 내가 거기 있는 걸 모르고 아무 할 일이 없는 것이다. 지금은 그런 걸 전혀 못한다. 일할 시간이 생겨서 미친 것처럼 일해 두 권의 책을 마쳤다. 자유롭고 아무도 나를 방해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런던, 뉴욕, 서울 같은 대도시에 있고 싶다는 생각이 날 슬프게 한다. 내가 서울서 좋아하는 곳은 물론 강남이고 그중에서도 거리의 작은 음식점들을 좋아한다. 나는 항상 크고 붐비는 도시를 좋아했다. 강남의 레스토랑에서 혼자 일하는 것이 군중 속에서 혼자가 되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곽아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