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제가 여기 온다고 하니 어머니께서 우셨어요. 어머니께는 뉴욕대 졸업장이 와닿지 않고, 어머니께 제 모교는 동국대인 거였어요.”
25일 서울 오후 장충동 동국대 본관 남산홀,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의 박천휴(42) 작가는 이날 모교의 교수, 후배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윤재웅 총장으로부터 명예 졸업장을 받은 뒤 이렇게 말했다. 그는 2005년 이 대학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해 1년을 다니다 휴학하고 미국으로 건너갔고, 뉴욕대를 졸업했다. 모교에서 받는 입학 20년 만의 졸업장인 셈. “오면서 쑥스러웠어요. 졸업 가운을 입게 될지도 몰랐고요.” 한국 소극장에서 출발한 뮤지컬로 미국 공연계 최고 권위 토니상 6관왕을 차지하며 브로드웨이를 평정한 작가는 갓 대학을 졸업한 20대 젊은이처럼 활짝 웃었다.
◇‘우연’ 아래 쌓인 도전과 노력
박 작가는 명예 졸업장 수여식에 이어 민세진 교무처장(경제학과 교수)과 대담 형식으로 특강을 진행했다. 민 교수는 “동문 인증부터 하자”며 장난스레 “자주 다녔던 곳”을 물었다. “‘하얀 집’을 자주 갔던 기억이 난다”는 박 작가의 답에 청중들의 환호와 웃음이 터졌다. ‘하얀 집’은 충무로역 인근 동국대생들의 단골 주점. “새내기 OT 하는데 여장(女裝)하고 춤췄던 기억도 선명해요. 학교가 도시 중심에 있다는 게 매력적이었어요. 도시 중심에서 문화생활하며 문화 사업에 몸담는 사람이고 싶다, 쉽게 말하면 무언가 만드는 사람이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박 작가는 동국대 재학 중에 이미 가수 ‘에반’(‘클릭B’ 멤버 유호석)의 노래 ‘울어도 괜찮아’, 가수 박상민이 부른 드라마 ‘키드갱’의 주제곡 ‘거친 인생’ 등의 가사를 쓴 작사가로 데뷔했다. 작사가로 성공이 약속된 것 같을 때, 뉴욕으로 건너가 미술(fine arts)을 전공했고, 뮤지컬로 영역을 넓혀간 것이다.
그는 “인생에 우연이란 없는 것 같다. 얼핏 우연처럼 보이는 일도 그 아래 과정을 밟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했다. “제가 가요 작사를 했기 때문에, 지금 제 창작 동반자가 된 윌 애런슨이 한국에서 뮤지컬을 작곡하고 뉴욕에 돌아왔을 때 주변에서 ‘너희 둘이 친해져 보라’며 소개해줬어요. 그래서 둘이 재미 삼아 제가 가사를 쓰고 윌이 곡을 붙여 노래를 5곡 만들어 데모 녹음을 갖고 있었죠. 마침 한국에서 온 뮤지컬 제작자가 그 노래를 들어보더니 영화 ‘번지 점프를 하다’ 원작 뮤지컬을 제안한 거예요.” 거저 얻어지는 우연은 없다.
◇“연예인병 걸리면 뺨을 때려줘”
토니상 수상 뒤 인생의 우선순위가 바뀐 게 있느냐는 질문도 나왔다. 박 작가는 “정말 아무것도 바뀐 게 없다. 단 하나, 비행기 이코노미석을 타기 어렵게 됐다”고 했다. “뜻밖에 많이들 알아보세요. 침 흘리고 자다가도 승무원이 봤을까, 다른 승객에게 사진 찍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돼요. 식사 안 나오는 시간에 ‘라면 하나만 주세요’ 하기도 어렵고, 하하.”
그는 주변의 변화에 대해서도 말했다. “10년 넘게 로열티 0.1%포인트 놓고 싸우고, 공연 제작하면서도 엄청 싸웠던, 친한 제작자가 있어요. 쓴소리를 정말 잘하는 분인데 어느 순간 ‘예스(yes)’만 하는 거예요. ‘응’, ‘좋아’, ‘응, 올려줄게’ 이렇게요.” 박 작가는 “이러다 내가 버릇 나빠지겠구나 싶어 무서웠다”고 했다. “그래서 그 제작자에게 ‘내가 연예인병, 줄여서 ‘연병’ 걸리면 정신 차리게 뺨을 때려줘’ 했죠. 그랬더니 제작자가 너무 기대된다고, 꼭 한 번만 걸려달라고 하더라고요, 하하.”
두려움 때문에 성공 가능성을 먼저 따지는 성향이어서 첫 시작이 너무 어렵다는 후배도 박 작가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는 “극작가에게 가장 두려운 건 매일 아침 만나는 모니터의 빈 페이지”라며 “그 공포를 이겨내고 익숙해져야 한다. 처음부터 잘할 수 없다는 한계를 받아들이면 그 순간부터 조금은 쉬워진다”고 했다. “윌과 하루 종일 쓰레기 같은 초안을 아무렇지도 않게 ‘좀 읽어봐줘’ 하며 주고받아요. 잘 안 나와도 고치면 되지 생각합니다. 극작뿐 아니라 세상 모든 일이 그럴 것 같아요.”
◇“꿈꾸는 건 사치가 아닙니다”
박 작가는 “불확실성의 시대, 꿈꾸는 게 사치 같다”는 후배의 질문에 “이 나라 안에 있을 땐 모든 게 불확실하고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바깥에 나가 보면 ‘여긴 더 헬(hell·지옥)이잖아’ 생각하게 된다”고 말을 꺼냈다.
“새는 본능적으로 자기 둥지를 꾸미잖아요. 미국 시골에 가면 아름다운 나뭇가지와 잎으로 꾸민 아름다운 둥지를 봐요. 그런데 뉴욕의 새는 쥐와 다를 게 없어요. 더러운 쓰레기로 둥지를 꾸미더라고요. 저는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어려운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아름답게 자기 삶을 가꾸고 둥지를 꾸미는 게 인간인 것 같아요. 꿈을 꼭 이뤄야만 의미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꿈을 갖고 한 발씩 나아가고, 조금씩 나아지는 게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꿈 꾸는 건 사치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