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적어 상대를 살해할 수 있다면 뭘 할 수 있을까.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부터 우연으로 가장된 죽음까지, 그 죽음의 방식까지 지정할 수 있다면. 14일 서울 디큐브 링크아트센터에서 네 번째 시즌을 개막한 한·일 공동 제작 뮤지컬 ‘데스노트’에서, 우연히 사신의 데스노트를 갖게 된 천재 소년 ‘라이토’는 범죄자들을 죽여 망가진 세상을 고치려 한다. 그가 정의를 실현하는 신의 역할을 자임하며 폭주할 때, ‘엘’이라는 또 다른 천재가 무차별 살인을 막기 위해 나선다.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는 치열한 두뇌 싸움, 인간과 사신(死神)의 애증이 엇갈린다.
이 뮤지컬은 한·일 양국에서 매진 사례를 양산하는 흥행작일 뿐 아니라, 2023년 제7회 한국 뮤지컬 어워즈 작품상, 연출상, 무대예술상 등 네 부문을 수상하며 작품성까지 공인받았다. 일본의 베스트셀러 만화 원작을 무대로 옮긴 작가는 미국인 아이반 멘첼. 개막을 앞두고 한국에 온 그는 “갈수록 극단화하는 영웅 숭배, ‘라이토’와 ‘엘’의 대결 구도는 원작이 처음 나온 21년 전보다 지금 더욱 시의적절하고 현실적”이라고 했다.
◇“지금 세상엔 수많은 라이토가 있다”
“예전엔 영웅과 악당이 명확했죠. 하지만 지금은 소셜미디어가 그 모든 경계를 흐려 놓았어요. 각자가 자신의 생각을 강화하는 버블 안에 갇혀 ‘우리끼리’만의 ‘사실’을 갖고 살아가지 않나요. 누군가를 ‘영웅’이라 부르며 도덕적으로 합리화하는 ‘라이토’와 다르지 않은 경우를 현실에서도 만납니다.” 최근 제작사 오디컴퍼니에서 만난 멘첼은 “어쩌면 지금 세상엔 정의의 이름으로 상대를 악마화하고 살해하는 수많은 ‘라이토’가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했다. “어쩌면 지금 관객은 이 뮤지컬이 현실과 겹쳐지는 면에 열광하는 건 아닐까요.”
그의 ‘데스노트’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긴장감을 뮤지컬 언어로 옮긴 놀라운 해석이라는 평을 받는다. 그는 원작 만화를 무대화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정의와 살인, 그 사이의 도덕적 경계선”이라고 했다. “데스노트는 정의를 위해 사람을 죽이는 이야기이고, 그 극단성이 바로 흥미로운 지점이죠. 누구나 처음에는 ‘저 사람은 죽어 마땅하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다음 단계부터는 각자의 도덕적 기준이 흔들립니다. 관객이 그 경계선에서 스스로의 판단을 시험해보길 원했어요.”
그럼에도 그는 “사랑은 모든 선택의 원동력이고 ‘데스노트’의 숨은 주제 역시 사랑”이라고도 했다. “라이토의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 엘의 집착, 라이토를 사랑하는 ‘미사’의 헌신, 사신 렘의 사랑, 라이토의 자기애까지,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인물들을 움직이죠. 뮤지컬은 감정의 언어이기에 무대에서 그 점을 더 강조하려 했습니다.” 멘첼은 “영화는 그대로 남지만, 무대는 늘 다시 만들어진다. 미국 브로드웨이 같은 ‘오픈 런(무기한 공연)’이 아니라 시즌제인 한국에선 매번 작품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도 매력”이라고 했다.
◇동서양 감정 표현 달라도 인간 욕망은 같아
‘데스노트’뿐이 아니다. 2019년부터 두 시즌을 공연한 ‘엑스칼리버’, 2016년부터 올해 네 번째 시즌까지 공연한 ‘마타하리’, 미국 브로드웨이를 거쳐 12월 서울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세 번째 시즌 공연을 앞둔 ‘보니 앤 클라이드’까지 많은 흥행 뮤지컬을 그가 각색하거나 새로 썼다. 한국과 일본에서 유독 흥행작이 많은 이유를 묻자 그는 “동서양의 감정 표현은 다르지만, 인간의 욕망은 같다”며 웃었다. “한국 관객은 감정 표현이 더 풍부하고, 드라마틱한 전개를 좋아합니다. 서구의 관객보다도 집중력이 길고, 군무나 합창 장면을 즐깁니다. 그런 점이 프랭크 와일드혼의 서사적 음악과도 잘 어울립니다.”
그는 “한국 배우들의 감정 표현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도 했다. “목소리, 감정, 집중력 모두 놀랍죠. 한국어 가사를 작업할 때 언어의 리듬 차이도 배웠어요. 한국어는 영어보다 음절이 많아. 두 줄짜리 영어 대사가 한국어로는 네 줄이 되더군요. 발음에 집중하며 대사의 리듬을 새로 구성하게 됐고, 제게는 큰 공부가 됐습니다.”
그의 왼쪽 팔목엔 염주 팔찌가 있었다. 서울 조계사에서 산 것이다. “한국에 오면 꼭 조계사에 들릅니다. 결과가 아니라 준비와 과정에 의미를 두는 불교식 사고가 저를 편안하게 합니다. 세상은 결과만 중시하잖아요.” 그는 뮤지컬 작업을 계속하는 동력을 묻자 “연결(connection), 그게 전부”라고 했다. “서로의 마음이 이어지는 것,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관객과 배우, 예술가와 세계가 연결되는 순간을 위해 저는 계속 무대 위 이야기를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