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주년 기념 공연 퍼레이드를 이어가고 있는 극단 '공연배달서비스 간다' 출신의 스타 배우들. 왼쪽부터 김민재, 김지현, 이희준, 진선규. /바이브액터스·BH엔터테인먼트·엘줄라이엔터테인먼트

‘범죄도시’의 조선족 조폭부터 액션코미디 ‘극한직업’, SF ‘승리호’까지 최근 가장 각광받는 배우 진선규,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의 순정남에서 영화 ‘남산의 부장들’의 경호실장까지 폭넓은 배우 이희준, ‘범죄도시3′ 등의 악역·경찰 명품 조연 김민재, 연극·뮤지컬을 넘어 ‘D.P. 시즌2′, ‘사랑한다고 말해줘’ 등 드라마에서도 활약 중인 김지현….

이 배우들은 사실 ‘무대 동향(同鄕)’이다. 연극 무대에서 이들의 고향은 극단 ‘공연배달서비스 간다(簡多)’(이하 ‘간다’). 불러주면 달려 ‘간다’는 뜻 뿐 아니라, 어디든 훌쩍 갈 수 있을 만큼 간(簡)결 하고 다(多)양한 공연을 하겠다는 중의적 의미가 담겼다. 한예종 시절 배우들의 신체언어와 아카펠라 음악으로 빚어낸 독특한 연극 ‘거울공주 평강이야기’를 시작으로 이 극단을 만들고 이끌어온 이는 대표이자 연출가·배우 민준호(47). ‘간다’는 극단 대표작을 내년초까지 잇따라 무대에 올린다. 신체극(physical theater) ‘템플’은 서울 대학로 서경대예술센터에서 오는 18일까지 마지막주 일정만 남았다. 이후 3월 15일~5월 26일 연극 ‘그때도 오늘’을 공연하고, 그 다음엔 ‘꽃, 별이 지나’, ‘나와 할아버지’, ‘뜨거운 여름’ 등이 이어진다. 한 극단이 ‘20주년 기념 공연 퍼레이드’를 기획하고, 그 극단의 이름과 작품을 기억하는 관객들이 몰리는 것 자체가 참 드물고 귀한 일이다.

극단 '공연배달서비스 간다' 대표 민준호 연출. /사진가 서성진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작품으로

-극단이 20년을 버티기 쉽지 않습니다.

“평소엔 각자 작업을 하다가 모일 때 모이는 시스템이라 오히려 20년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옛날엔 선배들한테 욕도 많이 먹던 방식이었어요. 예산을 세우고 거기에 맞춰 운영해가던 많은 극단이 사라졌잖아요. 저희는 전략적인 건 아니었는데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저는 우리 배우들에게 영화나 드라마 같은 매체 일이 들어오면 꼭 해야 된다고 말해요. 그래야 먹고 살 수 있다고. 10주년 때 잠깐 헤어질 때는 약속을 했어요. ‘우리, 극단에 자꾸 뭘 바라지 말고, 다음에 돌아올 때는 100만 원씩 묻어놓고 할 수 있게 돈 벌어 오자.’ 근데 다들 생각보다 더 많이 벌더라고요, 하하. 사실 몇 주년 이런 거 쑥스럽기도 하지만 가족 같은 분위기여서, 같이 이걸 해냈다는 게 너무 좋아서 이렇게 20주년 공연도 올리게 된 것 같아요.”

'공연배달서비스 간다' 출신 배우 진선규. 영화 '극한직업' 출연 모습과 신체극 '거울공주 평강이야기' 당시 모습. /CJ ENM·공연배달서비스간다

-’간다’에서 스타 배우가 많이 나왔죠.

“제가 한예종에서 기계체조 동아리 회장으로 애크러배틱을 사람들한테 전파하고 있었어요. 그 때는 학교 학생이 아니었던 희준이와 민재가 수업 받으러 와서 알게 됐어요. 또 학교 다닐 때 수업 시간에 ‘거울공주 평강이야기’의 모태가 되는 작품을 발표했거든요. 움직임과 몸짓 언어, 노래가 중심이 되는 초기 모델이었죠. 그걸 교수님들이 좋게 봐주시니 용기를 얻어서, 졸업 때 학교에서 100만원 지원금을 받아서 완성했어요. 민재가 출연하면서 나중에 한예종 들어왔고, 선규는 그 때 이미 극단원이었고. 이희준, 진선규, 김민재, 다 ‘간다’ 초창기 배우들이에요. 민재는 지금 제주도에서 예술학교도 만들어서 활동 중이고, 영화 쪽에서 워낙 인정받는 배우니까.”

'공연배달서비스 간다' 출신 배우 이희준. '거울공주 평강이야기' 출연 당시 모습(왼쪽)과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 출연한 모습. /공연배달서비스간다·쇼박스

-’간다’로 뭉쳤던 사람들이 화려하네요.

“사실 여배우들은 남자 배우들보다 성공하기 좀 힘든 게 현실이에요. 그래도 ‘간다’에서 함께 했던 여배우들은 일단 공연에선 다들 자신 있게 톱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연기력을 보여주는 친구들이 됐어요. 저희는 여배우들 연기력을 남배우들이 항상 질투하거든요. 유연이나 김지현이나 다들 너무 잘하니까. 그런 친구들이 올드 멤버고요. 10주년 이후에 새로 온 양경원, 오의식, 차용학 이런 친구들도 이제 다 먹고 사니까 기특하죠, 다행이고. 저희 극단이 사실 프로젝트 그룹 스타일이어서 10주년 단체 회식 때는 100명이 넘더라고요. 단원제로 월급 주는 극단도 아닌데 함께 작업한 친구들끼리는 다 같이 한마음으로, 그렇게 마음의 소속감을 갖고 지내는 것 같아요.”

◇”와줘서 고맙다, 출연료는 주마”

-이제 다들 출연료도 비싼 배우가 됐는데요.

“지금은 저의 이 멋진 동료들이 연극 출연료 준다고 하면 다 자기들은 안 받겠다고 해요. 많이 버니까. ‘야, 웃기지 마라. 난 줄 거다. 어디 가서 공짜로 했다는 소리 하지 말고, 하하. 연극배우는 이 정도 받는 거다.’ 어렵게 성공한 뒤에도 연극을 잊지 않는 동료들이 참 멋있죠. ‘그냥 니들이 원래 받던 돈 받으면서 출연해주는 것만으로도 좋은 거야. 이제 그 정도 버틸 능력은 돼. 그리고, 최고의 배려는 지방 공연 같이 가 주는 거야’ 하죠. 다행히 각자 많이 부족하지 않게 인생의 맷집들을 길러서 유지가 되는 것 같아요. 또 나가서 욕 안 먹고 좋은 배우라는 얘기 들으니까. 단지 다 결혼하고 애가 생겨서 저랑 안 놀아준다는게, 하하. 이러면서 또 20주년을 맞고 있어요.”

'공연배달서비스 간다' 출신 배우 김지현. 넷플릭스 시리즈 'D.P. 시즌 2' 출연 모습(위 사진)과 신체극 '거울공주 평강이야기' 무대에서 진선규와 함께 공연하는 모습. /넷플릭스·공연배달서비스간다

-20주년 기념 퍼레이드의 첫 공연이 ‘템플’이네요.

“그래도 ‘간다’ 다운 공연이라 생각했어요. ‘간다’의 시작이었던 ‘거울공주 평강이야기’(이하 ‘거평이’)도 하고 싶었는데, 진선규, 이희준 같은 배우들이 나이도 좀 들었고, ‘거평이’는 대본에 쓸 수 있는 게 한정적이라 진짜 몸과 말로 전수되는 공연이거든요. 마지막 세대인 양경원, 홍지희, 백은혜 이런 친구들이 다 40대고요. 하자고 했더니 거의 다 하겠다고는 했는데, 다들 영화나 드라마 일이 너무 바빠서요. 한 명만 빠져도 연기 합을 맞추려면 연습을 석달 이상 해야 하니…. 나중에 따로 프로젝트를 만들어서 하자고 했죠. 그럼 ‘거평이’ 다음 그래도 ‘간다’다운 게 뭘까. 딴 게 아니라 몸짓 언어가 중심이 되고 뮤지컬은 아닌데 뮤지컬적 성격까지 갖춘 그런 것. 최근 작품 중에선 ‘템플’이라고 생각했어요.”

‘템플’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안고 태어났지만 주변의 선의와 지원, 자신의 노력으로 극복해 미국 가축 시설의 3분의 1을 설계한 동물학자 템플 그렌딘의 이야기.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인기를 끌 때 ‘우영우의 실제 모델’이라고 해서 유명해지기도 했던 바로 그 인물이 주인공이다. 극단 ‘간다’의 ‘템플’은 몸짓 언어, 노래, 대사가 독특하게 어우러진 신체극. 2020년 10월 초연, 2021년 9월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재연에 이어 여러 지방 순회 공연을 진행했고, 작년 12월부터 3연을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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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극·리얼리즘 연극 번갈아 ‘단짠단짠’

-신체극(physical theater)과 리얼리즘 연극이 번갈아 무대에 오르는 ‘간다 20주년 퍼레이드’ 라인업도 흥미롭습니다.

“네, 관객 분들이 다른 맛을 느끼시라고 ‘템플’ 다음은 바로 ‘그때도 오늘’을 배치했습니다. 그 다음에 다시 한 번 ‘피지컬’ 느끼시라고 세 번째 작품은 ‘꽃, 별이 지나’를, 네 번째는 ‘다시 리얼리즘 한번 맛보실래요?’ 해서 ‘나와 할아버지’ 준비했고요. 그리고 다시 한 번 뜨겁게 몸과 연기가 조화된 젊은 청춘을 돌려드리려고 ‘뜨거운 여름’을 준비했습니다.”

-이번 ‘템플’은 걸그룹 출신으로 ‘레드북’ 같은 뮤지컬,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각광받는 김세정 배우가 주인공 템플 그렌딘 역할을 맡아 화제였습니다.

“캐스팅은 1년 전에 했어요. 세정이는 제가 개인적으로 연기 코멘트를 해주고 있는데, ‘템플’을 좋아해서 여러 번 보러 오더라고요. 연기 스터디 때 연습해오기도 하고. 너무 좋아해서 막을 수가 없었어요, 하하. 매체 연기도 너무 좋은 작업이지만, 실은 매체로 나간 친구들도 공연이 그리운 거예요. 온몸으로 다같이 연기하니까 본인들도 더 재미있고.”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갖고 태어나 미국의 저명한 동물학자가 된 템플 그렌딘 박사의 이야기를 그린 '공연배달서비스 간다'의 신체극 '템플'에서 주인공 템플 그렌딘으로 출연한 배우 김세정(맨 오른쪽). /공연배달서비스 간다

-김세정 배우와는 어떻게 인연이 되셨나요?

“이거 제가 ‘연기 레슨’이라고 얘기하기는 싫은데…. 그저 시간 되면 모여서 연기를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이 스무명쯤 돼요. 세정이도 그 중 한 명이었어요. 사실 연극쟁이 한 달에 200만~300만원 벌기도 힘든데, 동료들이 매체에서 성공한 다음에도 버릇이 무서운 게, 늘 제가 계속 치킨 사주고 찜질방 가서 계란 사주고 그랬거든요. 이 친구들이 우리 조금이라도 준호 형한테 돈 되는 일을 만들어주자 해서, 선규와 희준이를 필두로 연기 수업받는 배우 지인들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이제 스무명쯤으로 늘어난 거예요. 한 3~4년 됐어요. 그 다음부터는 선규도 희준이도 내 시간을 뺏으면 돈을 내요. ‘준호 먹여살리기 캠페인’이 된 거죠. 실은 마음 먹으면 공연보다 부업인 연기 레슨이 더 많이 벌죠. 그래도 매체에서든 무대에서든 함께 연습한 연기가 먹히고, 좋은 배우가 되어 가고, 그런 모습을 보면 즐거워요. 공연 준비하느라 요 5~6주는 쉬는 날이 거의 없었어요. 주중엔 연습하고, 레슨은 주말로 미뤄놓고.”

민준호 연출은 단국대 연극영화과(96학번)를 들어갔다가 중퇴한 뒤, 한예종 연극원(99학번)을 졸업했다. 연기과 3학년 때 휴학을 하고 무용과를 가기 위해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 댄스 센터 1년 과정을 국제 학생 비자 프로그램으로 수료했고, 다시 귀국해 ‘거울공주 평강이야기’를 준비하고 일반대학원 석사 과정에 해당하는 무용원 전문사 과정에 입학했다. 그에게 길었던 연기와 춤 공부는 몸짓 언어 중심의 신체극이라는 새로운 길을 열어가기 위한 바닥 다지기였던 셈이다.

◇무용수와 연기자, 다같이 만드는 워크숍

'공연배달서비스 간다'의 첫 작품이었던 '거울공주 평강이야기'. '언플러그드 뮤지컬', '아카펠라 뮤지컬'로 불리기도 했지만 기존 개념의 공연 장르로 규정할 수 없는 춤, 신체언어, 음악, 뮤지컬적 요소 등이 혼재된 이 극단 스타일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공연배달서비스 간다

-여전히 신체극을 낯설어하는 관객이 많습니다.

“리얼리즘 연극은 재미있게 대화하는 것처럼 편한데, 신체극은 또 그만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템플’에도 연기과 출신과 무용과 출신이 섞여 있는데, 워크숍은 똑같이 해요. 연기가 움직임이고 움직임이 연기라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요. 그걸 하면서 또 동작도 짜고, 동작이 연기인 걸 받아들이면서 다들 즐거워해요. 사실 우리나라에선 무용을 엄격한 스승 밑에서 ‘내가 하는 것처럼 춰’ 하는 식으로 배우는 경우가 많거든요. 다양한 피지컬 시어터에 대한 개념이 없어서, 무용수도 연기자도 처음이니까 다들 재미있어 하죠. 이 작업을 하다 보면 뭔가 이걸 바탕으로 각자 또 다른 인생을 펼칠 것 같은 느낌도 들고요. 이렇게 즐겁게 함께 놀다가 각자 자기들만의 피지컬 시어터를 만드는 연기자들, 무용수들이 많이 나오면 좋겠어요. 다양한 공연이 많아지면 공연을 보러 오는 이유도 많아질테고, 리얼리즘 연극이 아닌 공연도 외국처럼 인기가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고요. 저는 그런 고민들이 더 많아지도록 끝까지 노력하다가 사라질 생각입니다. 그래서 즐겁게 작업하고 있어요.”

-’템플’을 피지컬 시어터라고 부르는 데 대해 ‘실은 적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달리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다’고 하신 적이 있죠.

“그건 피지컬 시어터에 대한 존중이기도 해요. 진짜 피지컬 시어터라고 명명할 수 있는 유럽의 공연들을 보면 정말 존경스럽거든요. ‘템플’ 같은 작품은 그것보다는 좀 쉬운 ‘징검다리’ 정도 되고 있다고 봐요. 누가 ‘템플은 템플 자체가 장르다’고 했을 때, ‘좀 건방져 보이긴 하는데 그닥 틀린 말은 아니네’ 생각 했어요. 템플이라는 소재와 주제에 맞춰 만들다 보니 템플만이 할 수 있는 뮤지컬이 나왔거든요. 즉흥을 그대로 넣기도 하고, 피지컬 시어터라고 하면 뭔가 계속 움직여야 한 것 같은 강박도 넘어서서, 모든게 조화롭게 되면서 갑자기 새로운 무언가가 툭 튀어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공연. 그런 면에서 템플이 참 소중하죠. 그래서 ‘템플이 곧 장르’라는 말이 참 오히려 겸손한 의미에서 좋았던 것 같아요.”

20주년을 맞은 극단 '공연배달서비스 간다'의 최근작인 피지컬 시어터 연극 '템플'의 2023~24년 공연.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갖고 태어났으나 미국 가축시설의 3분의 1을 설계한 동물학자 템플 그렌딘의 이야기를 담았다. /공연배달서비스 간다

-’간다’의 많은 작품들이 연극, 무용, 음악극, 뮤지컬, 피지컬 시어터 등의 여러 요소를 갖고 있죠.

“그 얘기가 처음 ‘거울공주 평강이야기’ 할 때부터 계속나왔어요. 이게 뮤지컬이냐, 신체극이냐. 뭐라고 규정해야 하나. 그런데 규정은 계속 만들어지는 거고, 우리가 하는 공연은 하나잖아요. 배우의 몸으로만 환경을 만들고 악기 소리와 백그라운드 음악을 다 스스로 내고, 거기에 맞춰서 노래를 하는데, 단 한 번도 악기도 무대도 나오지 않는 작품. 그걸 어떻게 명명할지 정한다는 건 어쨌든 원래 있던 카테고리에 집어넣는 건데, 알려진 범주에서 죄다 벗어나거든요. 나름대로 신선한 고민이었고 좋은 논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못 정하겠네요. 그래서 그냥 많은 분들이 알기 쉽게 ‘아카펠라 뮤지컬’로 할까, 가끔은 아니면 처음 ‘언플러그드 뮤지컬’이 좋았었나 싶기도 하고요. ‘신체극’ 표현이 맞는 건지, 근데 이제 멈출 수가 없으니까, 그런 작업을 계속할 거라서 나중에 멋있게 하나 만들어 주십시오. ‘간다르’? ‘지멋대로’? 하하.”

◇언플러그드 뮤지컬? 아카펠라 뮤지컬?

-’템플’은 지방 공연도 많이 했죠. 지방 관객 반응은 어땠나요?

“진짜 지방은 거의 뭐 눈물 바다예요. 웃음 바다, 눈물 바다, 애크러배틱은 또 애크러배틱으로 그냥 신나게 봐주세요. ‘엣헴’하면서 ‘얼마나 잘 하나 보자’ 하는 관객이 없어요. 열 군데를 넘게 다녔는데 저희가 단 한 번도 지방 가서 관객 분들께 감동받지 않은 적이 없었어요. 템플을 어렵게 보는 분들은 ‘저거 왜 저렇게 하지?’ 하고 머릿속에서 재고 있는 걸 거예요. 근데 그냥 이상하게 하고 있는 걸 이상하게 보면 되지 뭐 하고 보다가 막 만화처럼 일어나는 것들을 그냥 즐겁게 봐주시니까. 순수하게 받아들여주셔서 너무 감사하죠.”

20주년을 맞은 극단 '공연배달서비스 간다'의 최근작인 피지컬 시어터 연극 '템플'의 2023~24년 공연.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갖고 태어났으나 미국 가축시설의 3분의 1을 설계한 동물학자 템플 그렌딘의 이야기를 담았다. /공연배달서비스 간다

-’간다’는 경기도 고양문화재단의 고양아람누리 상주단체로 오래 있었죠?

“한 8~9년을 거기에 있었습니다. 정말 고마운 시간이었어요. 어떤 공연을 하려고 하면 제작하는 PD와는 좋은 의미로 부딪칠 수 밖에 없거든요. ‘이렇게 하면 수익이 너무 없어 힘들 것 같다’ 이런 얘기들요. 근데 고양은그런 것 상관없이 오롯이 그냥 작품에 집중해서 창작할 수 있게 해주는 곳이었어요. 대학로는 대학로 공연의 특성이 있고, 그 관객을 신경쓸 때 나오는 소재와 주제, 캐스팅 범위가 있거든요. 근데 그런 부분에 제약 받지 않고, 우격다짐으로 도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어요. 지난해 올린 ‘어린왕자’ 같은 작품도 고양이 아니었다면 태어나지 못했을 거예요. 유명한 배우 한 명도 안 나오고, 제목이 ‘어린왕자’인데 어린왕자도 안 나오고, 대사가 있지만 신체언어가 주를 이루는 그런 작품. 그래서 ‘템플’도 고양에서 만들어졌죠. 항상 지원해주시고, 마지막에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합니다.”

-소재는 어떻게 얻고 작품은 어떻게 만들어 가나요?

“사실 작품마다 달라요. ‘템플’ 같은 경우는 사람에게서 영감을 얻은게 맞는 듯 싶네요. 안무가 심새인을 더 잘 사용하고 싶었어요. 이 특출난 친구가 뮤지컬 안무에 지쳐있을 때 ‘형, 나 어려운 게 아니고 힘들어. 그냥 동작만 짜주는 것 같아’ 그러더라고요. ‘어, 이 친구 봐라. 자만이 심하네, 하하. 좋아, 네가 너에게 자극이 될 엄청나게 힘든 작품을 가져다주마.’ 그래서 뇌과학 책을 읽다가 알게 된 템플 그렌딘 얘길 했죠. ‘이 사람은 그림으로만 세상을 바라봐. 니가 이걸 다 눈에 보이게, 그 사람이 보는 세상이 관객들 눈에도 보이게 만들어야 되는 거야.’ 그랬더니 눈을 반짝 반짝하더라고요. 심새인 뿐 아니라 역시 무용원에서 만난 김설진도 ‘간다’의 안무이고, 두 사람에게 저는 조안무인데요. ‘템플’이 새인을 자극하려고 만든 거라면, 설진은 잔인해요. 그래서 배우 욕심 많은 걸 이용하죠. 너도 한 번 굴러봐라, 그러면 나와 똑 같은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야! 하하.”

◇연기는 가르치는 게 아니라 발견하는 것

20주년을 맞은 극단 '공연배달서비스 간다'의 최근작인 피지컬 시어터 연극 '템플'의 2023~24년 공연.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갖고 태어났으나 미국 가축시설의 3분의 1을 설계한 동물학자 템플 그렌딘의 이야기를 담았다. /공연배달서비스 간다

-이미 전 공연으로 인정 받은 김주연, 박희정 배우에 새로 합류한 김세정 배우까지, 이번 ‘템플’의 템플 그렌딘 역할 3명도 다 느낌이 다른 배우들입니다.

“주연이도 너무 좋고 희정이도 너무 좋죠. 세정은 이번이 처음이니까, ‘니가 제일 젊어서 제일 높이 뛴다’ 그랬어요. 어릴 때 가장 폭력적이던 자폐 스펙트럼의 에너지를 표현하는데 가장 최적화된 친구라고 할 수 있죠. 저는 배우에게 캐릭터를 입히는 걸 안 좋아해요. 그런 건 배우의 오리지널리티 침해니까. 배우가 캐릭터에 휘어잡히면 상황을 덜 보는 나쁜 습관이 생겨요. 나는 이런 캐릭터 연기하는 거라고 선을 그으니까. 그렇게 해서 안전고리를 잡고 방어막을 세운 배우가 살아있지 못하는 연기를 하는 걸 너무 많이 보거든요. 그래서 저는 캐릭터 ‘그것’이 아니라 그냥 사람인 채로 무언가에 반응하는 걸 보고 싶어요. 셋 다 그렇게 받아들여주고 해주고 있어서 감사할 뿐이죠.”

-연출의 디렉션으로 배우를 가두기보다 그 배우를 어떻게든 더 끌어내려하는군요.

“네. 사실 겸손이 아니라, 저는 연기는 가르치는 게 아니라 발견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 친구가 용기가 없거나 다른 무언가에 휩싸여서 볼 것을 못 볼 때 그걸 일깨워줄 뿐이죠. 가르친다기보다 다시 디자인하는 거죠. 흉내도 내보고, 발견하고, 그렇게 지내보고, 한 스텝 더 나가자, 이렇게요. 예를 들어 실제 자폐인들은 눈을 맞추지 않아요. 보지 않아도 보고 있어요. 고개 돌리고 있지만 실은 가장 잘 보는 방식으로 보고 있는 거예요. 근데 ‘템플’을 연기하는 배우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추고 웃어요. ‘네 웃음 참 예뻐. 근데 그건 사회성을 기른 일반인의 웃음이야. 템플 이 아이는 아마 혼자만의 자기만을 위한 웃음을 웃었을 거야. 그걸 진화시켜봐. 눈 맞추면 안 돼. 돌아보지마.’”

-’간다’는 20주년 기념 공연 이후에도 이 모습대로 계속 가게 되는 건가요?

“저는 ‘간다’는 그냥 이름일 뿐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착륙을 잘 해야지 하는 생각은 하고 있어요. 한예종 연극원 교수셨던 극단 차이무 연출 이상우 선생께 배운 철학일 수도 있고요. 친구들이 좋아서 한 공연이고, ‘이왕 하는 거 즐겁게 하자’였고, 이왕 하는 거 ‘다른 사람은 못하고 우리만 할 수 있는 걸 하려고 노력하자’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간다’가 지속되고 무슨 큰 회사가 되고 이런 꿈은 전혀 없습니다. ‘간다’가 계속 오고 싶은 놀이터라면 지속돼도 좋고, 안된다면 오히려 다 벗어던지고 조금 더 도전하고 창작하는 쪽 방법도 천천히 모색해 보자. 피지컬 시어터는 나이들수록 힘들지만, 나이 든대로 또 멋있는, 그 사람이어서 존재할 수 있는 그런 소재를 또 찾겠죠.”

◇'간다’ 20주년 ‘그때도 오늘’, 내달 15일 개막

3월 돌아오는 2인극 '그때도 오늘'에 캐스팅된 배우들. /공연배달서비스 간다

18일 ‘템플’ 공연이 끝나면, ‘간다’의 20주년 기념 퍼레이드 두번째 공연 ‘그때도 오늘’은 3월 15일 서울 대학로 서경대예술센터에서 개막해 5월 26일까지 이어진다. 1920년대 부산, 1940년대 제주도, 2020년대 최전방 등 각기 다른 장소와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2인극. 영화 ‘황야’ ‘남산의 부장들’의 이희준이 오랜만에 다시 연극 무대로 돌아온다. 또 ‘경성 크리처’ ‘우리들의 블루스’의 최영준, ‘밤에 피는 꽃’ ‘일타 스캔들’의 오의식, 또 ‘웰컴투 삼달리’의 양경원, ‘아라문의 검’의 차용학, ‘드라큘라’ ‘전설의 리틀 농구단’의 박은석 등 매체와 무대를 넘나드는 배우들이 관객과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