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배우가 함께 웃는 것만으로 무대 위가 환하게 밝아졌다. 연극 ‘장수상회’가 공연 중인 서울 두산아트센터에서 만난 신구(오른쪽)와 김성녀는 “자식과 부모, 남편과 아내가 함께 가족의 소중함을 되새겨보게 하는 작품”이라고 했다. /박상훈 기자

“마흔 다 돼서 결혼해 아직 50년도 안 됐어. 살면서 어떨 땐 못마땅하고 밉기도 했는데, 지금은 보면 측은하고 다독여주고 싶고 못 해준 것만 생각나지요. 이 연극 주인공 성칠이도 그런 마음 아니겠어요?” (신구)

“처음부터 좋아하면서 왜 그렇게 고약하게 굴었냐고 하니까, 고무줄 끊는 남자애들처럼 그러는 거래요. 나이 들어도 이렇게 가슴이 뛰는구나. 좋아하는 마음은 사람을 활기차고 아름답게 만드는구나 싶어요.” (김성녀)

무대 위에서 커플로 만난 데뷔 61년 차 배우 신구(86)와 47년 차 배우 김성녀(72)를 최근 연극 ‘장수상회’가 공연 중인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 분장실에서 만났다. 둘이 합쳐 158세, 연기 경력은 108년 차. 2016년 초연 뒤 80여 도시에서 30만 관객을 모은 이 베스트셀러 연극 포스터엔 ‘라스트 댄스’라고 써 있다. 이번 시즌은 신구와 이순재(88), 김성녀와 박정자(81)의 더블 캐스팅. 관객에겐 이 관록의 노배우들이 펼치는 연기 앙상블을 무대 위에서 만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셈이다.

‘장수상회’는 치매라는 무거운 소재를 세파에 낡지 않은 사랑과 따스한 가족애로 끌어안는 작품이다. 박근형·윤여정이 주연한 강제규 감독의 동명 영화가 원작. 성격 괴팍한 노신사 ‘김성칠’(이순재·신구)은 옆집으로 이사 온 꽃 가게 주인 할머니 ‘임금님’(박정자·김성녀)을 보고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 사이엔 놀라운 비밀이 숨어 있다.

두 배우가 함께 웃는 것만으로 무대 위가 환하게 밝아졌다. 연극 ‘장수상회’가 공연 중인 서울 두산아트센터에서 만난 신구(오른쪽)와 김성녀는 “자식과 부모, 남편과 아내가 함께 가족의 소중함을 되새겨보게 하는 작품”이라고 했다. /박상훈 기자

처음엔 알콩달콩 황혼 연애담인 줄 알고 함께 웃던 객석은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눈물바다로 변해 간다. “보신 분들 말이 선생님들(이순재·신구)이 자전거를 타고 등장하는 첫 장면부터 울컥울컥한대요. 무대에 건재하게 서 있는 모습만으로도 감동을 줄 수 있는 이런 선배들이 또 있을까요.” 김성녀의 말에 신구가 슬며시 웃으며 “해마다 공연을 해서 또 보고 싶은 분이 있을까 걱정했는데 이렇게 잊지 않고 찾아주시니 너무 고맙고 더 힘이 난다”고 했다. “연극하는 사람들이 생리적으로 그래요. 쓰러질 것 같다가도 무대에 서면 힘이 생기고. 체질이 무당들이라 그런가, 허허.” 김성녀는 “성칠이 역이 움직임이 많아 체력적으로 힘든 데다 대사량도 엄청난데 공연 끝나고 나면 ‘개운하다’고 하신다”며 또 웃었다.

두 사람은 1998년 연극 ‘죽음과 소녀’ 이후 두 번째 무대에서 만났다. 꾸준히 연극 무대에 서 온 김성녀지만 “출연진 중에 내가 막내가 돼본 건 기억도 안 날 만큼 오랜만”이다. 이 연극에 오래 함께했던 배우 손숙이 최근 당한 골절상 회복이 늦어지자, 배우 박정자가 세 번 전화를 걸어 설득해 김성녀를 긴급 합류시켰다. “연습량이 부족한 상태라 함께 연습하면서도 누가 될까 걱정했는데, 첫 대본 낭독 때부터 신구 선생님이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면서 잘했다고 격려해주셔서 정말 기뻤어요. 이 연극 하면서 어려지고 젊어진 것 같아요.” 신구가 옆에서 “예전에도 잘 했지만 지금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르익고 노련해졌더라”며 또 칭찬을 한다.

/(유)장수상회문전사

카리스마 넘치는 배우로 알려진 박정자의 순애보 연기는 ‘장수상회’ 이번 시즌의 새로운 발견이다. 신구는 “여성적이고 부드러운 모습이 자연스러워 볼 때마다 속으로 놀란다”고 했다. 김성녀에게도 마찬가지. “임금님이 극 중 대사에 ‘여자라는 말 참 오랜만에 듣네. 내 인생에서 사라진 말이었는데’ 하는 부분이 있어요. 그 대사가 그렇게 가슴에 남더라고요.”

신구가 연기하는 ‘성칠’은 다정다감하고 따뜻하다. 반면 이순재는 여전히 힘 있고 화끈한 ‘성칠’이다. 성칠이 노래 ‘나 하나의 사랑’을 부르는 연극의 하이라이트 장면에서도 두 배우의 서로 다른 매력이 드러난다. ‘나 혼자만이 그대를 알고 싶소/ 나 혼자만이 그대를 갖고 싶소/ 나 혼자만이 그대를 사랑하여…’로 이어지는 노래. “신구 선생님은 정말 진심을 다해서 그 노래를 길게 하시고요. 이순재 선생님은 짧고 굵게 부르시죠. 느낌이 다 달라요.” 김성녀는 “이 연극을 보며 관객이 눈물짓는다면 그건 무대 위 성칠과 금님의 모습에서 자기 남편과 아내의 모습을 보기 때문일 것”이라고도 했다.

공연은 21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