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현지 시각) 세계 공연 예술 중심지인 뉴욕 브로드웨이의 ‘서클 인 더 스퀘어 시어터’에서 뮤지컬 ‘KPOP’ 공연이 한창이다. ‘칼 군무’와 역동적인 노래가 이어지자 600여 객석을 가득 채운 뉴요커 관객들은 발을 구르며 어깨를 들썩였고, 공연이 끝날 무렵에는 기립 박수로 화답했다. /정시행 특파원

“당신도 이제 한국어 좀 배우지 그래?”

미국 뉴욕에 진출한 한국 보이그룹 멤버끼리 “쟤 왜 저래?” “넌 좀 빠져” 같은 한국어를 섞어 티격태격하는 모습에 백인 제작진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네, 통역 좀 해봐”라고 말하자 가수 중 한 명이 영어로 이렇게 핀잔을 준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뉴요커 관객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박장대소를 했다. 이어 ‘칼 군무’와 역동적 노래로 채워진 화려한 무대가 펼쳐진다.

뉴욕 브로드웨이 뮤지컬 'KPOP' 개막을 앞둔 사전 공연을 관람한 관객들이 말미에 기립박수를 치며 흥겨워하고 있다. 한국어 가사와 대사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데도 관객 일부는 이를 알아듣고 웃는 등 이해에 어려움이 없어보였다. /뉴욕=정시행 특파원

지난 20일(현지 시각) 세계 공연 예술 중심지인 뉴욕 브로드웨이의 ‘서클 인 더 스퀘어 시어터’에서 공연된 뮤지컬 ‘KPOP’의 한 장면이다. K팝(한국 대중음악)을 소재로 한 뮤지컬로, 오는 27일 정식 개막을 앞두고 치러진 이날 프리뷰(사전 공연)에 객석 600여 석이 빼곡히 찼다. 언론 매체와 브로드웨이 관계자 등을 초청하는 공연이지만, 관객은 절반 이상은 이날 100~250달러(약 13만~34만원)의 티켓을 유료 구매한 이들이었다.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20일(현지시각) 한국 대중음악 산업의 이면을 다룬 뮤지컬 'KPOP' 공연 모습. /뉴욕=정시행 특파원

‘KPOP’은 K팝 아이돌 가수들의 분투기를 담은 작품. 어릴 때부터 십여 년간 ‘공장’으로 표현되는 혹독한 연습생 시절을 거쳐 무대에 서고, 데뷔 후에도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으려 애쓰며 뉴욕에서의 대규모 공연을 향해 한 걸음씩 내디뎌 가는 과정을 다룬다.

서울 강남의 소속사 ‘RBX’의 대형 솔로 여가수 ‘무이’를 주인공으로, 갓 데뷔한 8인조 보이그룹 ‘F8′, 데뷔를 준비 중인 5인조 걸그룹 ‘아르테미스’ 등 세 팀이 등장한다. 개인적인 생활을 모두 포기한 채 맹훈련하는 젊은이들의 야망과 고뇌, 부모와 매니저 등 기성세대와의 갈등, 한국계 미국인들의 정체성 혼란 같은 사회적 메시지를 다각도로 녹여냈다. 그룹 f(x) 출신 루나, 유키스(U-KISS) 출신 케빈, 미쓰에이(miss A) 출신 민, 스피카(SPICA) 출신 김보형 등 아이돌 출신 출연진은 앞서 17일 뉴욕 현지 기자회견에서 “실제 우리가 겪은 이야기”라며 울먹이기도 했다.

지난 10월 뉴욕 브로드웨이 서클 인더 스퀘어 시어터에서 열린 뮤지컬 'KPOP' 프레스 프리뷰에서 극중 보이그룹 'F8'이 공연하는 장면. /AFP 연합뉴스

이런 뮤지컬이 브로드웨이에 상륙했다는 것은 해외에서 K팝을 ‘예쁘고, 완벽하며, 재미있다’는 식으로 피상적으로 소비하던 수준에서 벗어났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K팝 산업의 이면, 한국 사회와 문화, 한국인의 특수한 정서 등을 포함해 한층 깊이 있는 스토리텔링으로 콘텐츠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미 NBC는 “글로벌 현상이 된 K팝이 브로드웨이 극장에 상륙했다”고 했고, 뉴욕타임스는 “수년 전만 해도 미국인들은 K팝이라고 하면 싸이 ‘강남스타일’만 떠올렸지만, 이제 방탄소년단과 스트레이 키즈 등이 미 음악 차트에서 수시로 1위를 하는 시대”라며 관련 뮤지컬이 나와도 놀랍지 않다고 했다.

지난 10월 뉴욕 브로드웨이 서클 인더 스퀘어 시어터에서 열린 뮤지컬 'KPOP' 프레스 프리뷰에서 극중 유명 솔로 여가수역 '무이'를 맡은 f(x)출신 루나가 공연하는 장면. /AFP 연합뉴스

‘KPOP’의 가사와 대사는 대부분 영어이지만, 극 흐름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을 수준에서 한국어 대사와 가사도 빈번하게 등장한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왜 나는 쉬면 안 돼?” “우리 결혼하자” 같은 한국어 대사가 들릴 때마다 미국인 관객 일부는 알아듣는 듯 웃으며 박수를 쳤고, 어떤 이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뮤지컬 넘버 중에는 ‘한국놈’ ‘시간낭비’ ‘엎드려’ 같은 한국어를 그대로 음차해 붙인 제목도 있다. 또 서울 잠원동과 홍대 앞 등 K팝의 메카들이 배경으로 등장, ‘여기가 뉴욕 맞나’ 싶을 정도였다.

지난 10월 뉴욕 브로드웨이 서클 인더 스퀘어 시어터에서 열린 뮤지컬 'KPOP' 프레스 프리뷰에서 극중 데뷔를 앞둔 걸그룹 '아르테미스(RTMIS)'가 공연하는 장면. /AFP 연합뉴스

이 뮤지컬을 작곡해 ‘브로드웨이의 첫 아시아계 여성 작곡가’에 오른 한국계 헬렌 박(36)은 기자회견에서 “영화 ‘기생충’을 보고 언어 장벽을 넘어설 수 있다는 용기를 얻었다”며 “한국적인 것을 당당하게 표현하면 다른 문화권 사람들도 우리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헬렌 박과 한인 2세 제이슨 김, 극단 우드셰드 컬렉티브가 구상한 이 작품은 지난 2017년 오프 브로드웨이(브로드웨이 외곽의 소극장들) 무대에서 같은 제목, 비슷한 내용으로 한 달간 파일럿 공연을 했다. 당시 전석 매진 행렬을 기록했고, 리처드 로저스 어워드 등을 받았다. 브로드웨이 공연은 통상 폐막일이 정해지지 않는 ‘오픈런’으로 시작하는데, ‘KPOP’은 일단 내년 4월까지 공연이 예정돼 있다. 연장될 가능성이 있다.

지난 20일 뉴욕 브로드웨이 뮤지컬 'KPOP' 관객들이 말미에 기립박수를 치며 흥겨워하고 있다. 10~20대 K팝 팬부터, 60~70대 정통 브로드웨이 '뮤지컬 덕후'들까지 공연을 함께 즐겼다. /뉴욕=정시행 특파원

이날 관객들은 K팝을 좋아하는 초등학생과 10대 청소년부터 뮤지컬 애호가인 60~70대 부부까지 다양했다. 이들은 흥겨운 멜로디에 발을 구르며 어깨를 들썩였고, 공연 말미엔 일제히 기립박수를 보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이 공연을 볼 겸 뉴욕 여행을 왔다는 메건(21)씨는 “걸그룹 트와이스를 좋아해 유튜브와 드라마 등으로 한국어를 공부해서 대사를 대부분 알아들었다”고 했다.

‘블랙핑크 팬’이라는 중학생 자녀를 데리고 온 레일라(43)씨는 “드라마와 영화, 음악, 화장품까지 모든 면에서 한국은 고품질의 대명사”라며 “아이가 K팝과 관련해 해 달라는 것은 대부분 같이 해 주고 있다”고 했다. 브로드웨이 관계자 브라이언(40)씨는 “K팝의 높은 완성도 뒤에 숨어 있는 스토리를 통해 한국 문화를 더 깊이 이해하게 해준 놀라운 쇼”라며 “젊고 역동적인 아시아계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는 작품은 이례적인데, 브로드웨이의 다양성을 더 풍부하게 해줄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