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포미니츠’의 크뤼거(김선경)와 제니(김환희). 배우 김선경(오른쪽)은 내면 연기를 보여주고 김환희는 폭발적인 에너지를 내뿜는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마지막 4분은 새의 비상처럼 자유롭다. /정동극장

네모난 감옥이 사각의 링처럼 보인다. 무대는 독일 루카우 교도소. 이쪽에는 재소자들에게 60년간 피아노를 가르쳐온 크뤼거, 저쪽에는 살인죄로 복역 중인 18세 소녀 제니가 있다. 제니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본 크뤼거와 피아노로부터 도망쳐온 제니가 한판 승부를 벌일 참이다.

‘포미니츠’(Four Minutes)는 이야기의 하중을 오직 피아노로 감당하는 뮤지컬이다. 무대는 피아노를 중심으로 턴테이블처럼 회전한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면 도처에 죽음이 있던 1945년, 젊은 크뤼거와 간호사 친구 한나의 비극이 풀려나온다. “한나가 공산주의자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느냐”는 질문이 날아올 땐 사방에서 권총과 빛줄기가 크뤼거를 겨눈다. 그녀는 진실을 숨겼고 친구를 지키지 못했다. 그 죄책감이 60년 뒤 제니에게 투사되는 것이다.

음악만 있으면 지옥에서도 꿈꿀 수 있다. 크뤼거는 레슨 규칙부터 가르친다. 규칙 없이 살아온 제니는 첫 수업부터 교도관을 폭행한다. 제멋대로인 연주에 반한 크뤼거는 “훔치고 싶은 그 재능을 지키라”고 하지만 제니는 “피아노는 나를 가두는 감옥”이라며 밀쳐낸다. 크뤼거는 교도소장을 설득해 제니를 청소년 콩쿠르에 내보낸다.

원작은 실화(實話)가 바탕인 영화 ‘포미니츠’(2006). 독일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이다. 두 주인공은 참혹한 기억을 틀어막거나 외면하느라 고통받아온 사람들이다. 다른 생을 향한 꿈은 전후(戰後) 독일 예술에 잠재된 갈망일 수도 있다. 5월 23일까지 정동극장에서 초연하는 뮤지컬은 ‘렁스’의 박소영이 연출했다. 피아노뿐인 무대를 선택해 라이브 연주가 돋보였고, 우산과 의자 같은 소품을 춤으로 활용하는 솜씨도 매끄러웠다.

제니는 수갑으로 양손이 뒤로 묶여 피아노를 등진 채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7번 템페스트를 연주한다. 예선을 통과한 제니가 아기를 잃은 상처를 크뤼거에게 고백할 때 “난 분명히 지옥에 갈 텐데/ 우린 죽어서도 만날 수 없는 걸까~”로 흘러가는 노래(작곡 맹성연)가 아프다. 스승과 제자는 마음의 문을 열고 가까워진다. 어느덧 서로에게 소속돼 있다.

콩쿠르 결선곡은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 독주곡이 아닌 협주곡이라는 게 중요하다. 마지막 4분, 정량할 순 없지만 펀치력은 뮤지컬이 영화를 압도한다. 북상하며 점점 세력을 키우는 태풍처럼, 제니의 연주는 슈만에서 즉흥으로 건너가면서 거칠게 폭발한다. 경찰이 들이닥치지만 그 연주를 멈출 수 없다.

제니는 피아노 전체를 악기로 쓴다. 그녀의 손이 닿으면 건반악기가 타악기로, 현악기로 변신한다. 일어선 채 발을 구르면서 튕기고 치고 두드리고···. 그것은 무대를 지배하는 연주이자 춤이다. 제니는 온갖 고난을 뚫고 바다에 도착한 물고기처럼 헤엄친다. 짜릿한 4분이다. ‘포미니츠’는 자신을 혐오하던 두 사람이 만나 상대를 치유하고 치유받으며, 마침내 서로를 구원하는 이야기다. 연주를 끝낸 제자가 스승을 향해 인사한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뮤지컬 '포미니츠'의 마지막 4분. /정동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