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는 90까지 하라는데 욕심이 없어요. 매미가 허물 벗듯 떠나야죠.”(박정자)

“매너리즘에 빠진 박정자를 더 쥐어짤 겁니다.”(윤석화)

연극 ‘해롤드와 모드’의 배우 박정자(오른쪽)와 연출을 맡은 윤석화. 박정자는 이언 매켈런(81·영국)이 햄릿 왕자에 도전한다는 소식을 전하자 “놀랍고도 기쁜 소식”이라며 “배우는 그래서 축복받은 존재다. 모든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했다. /신시컴퍼니

연극 ‘해롤드와 모드(19 그리고 80)’의 여주인공과 연출가 사이에 묘한 긴장이 흐른다. 80세 할머니 모드를 연기하는 박정자(79)는 2003년 처음 이 무대에 오를 때 “해마다 공연하고 여든 살에 모드처럼 끝낼 수 있다면 아름다울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우리 나이로 팔순. 박정자는 역대 7번째 ‘해롤드와 모드’를 끝으로 그 배역에서 은퇴한다. 18년 전 제작을 맡았던 윤석화(65)가 이번엔 연출가로 그녀를 배웅하지만 설렁설렁 보내진 않을 기세다.

‘해롤드와 모드’는 사는 데 싫증난 청년(19세 해롤드)과 죽음을 준비하는 할머니(80세 모드)의 이야기다. 둘은 장례식장에서 처음 만난다. 해롤드가 그곳에서 삶의 끝을 볼 때 모드는 삶의 시작을 본다. “자기 이야기를 좀 들려줄래” 하며 다가오는 모드에게 해롤드는 점점 마음이 끌린다.

박정자와 윤석화도 연극이라는 길 위에서 만났다. 윤석화가 언젠가 “오늘부터 언니라고 부를게요” 했더니 이런 호통이 날아왔다. “아니, 선생님이라고 해!” 왜 그랬을까. 박정자는 “좀 무서워 보이려고요. 질서가 필요하니까. 위계질서”라며 웃었다.

이 선생님은 이 연극을 ‘보험 상품’에 빗댄 적이 있다. 80세로 보험 기간이 만료되는 셈이다. 박정자는 “이미 많은 사랑을 받아서 연장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며 “홀가분하다”고 말했다. 10년 전 “마지막 공연 연출은 석화가 맡아달라” 했고 이렇게 약속을 지켰다지만, 글쎄올시다. 제작자는 따로 있는데 둘이서 김칫국을 러브샷한 것은 아닌지.

둘의 대화는 탁구 같다. 윤석화가 “선생님은 여러모로 뛰어나지만 연극에 대한 열정이 너무 과해서 때로는 말리고 싶을 정도”라고 하자, 박정자는 “내가 윤석화만 한 미모가 있니 뭐가 있니?”로 역공했다. 윤석화는 “미모가 떨어지지 뭐 달리 떨어지는 게 있수?(웃음) 이만큼 살아보니 미모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더라”로 받았다.

“후배 입장에서 보면 한 배역에 너무 익숙해져 매너리즘에 빠진 부분이 있어요. 첫사랑처럼 되돌려 놓거나 선생님이 가진 장점을 더 끄집어낼 겁니다. 저렇게 또 새로워질 수 있구나 싶게요.”(윤석화)

“우리는 서로를 뼛속까지 다 들여다봐요. 중간중간 부딪칠 수도 있어요. 그런데 능구렁이들이 돼 가지고 참겠지. 하하하.”(박정자)

무대에서 자신을 연소(燃燒)시키는 배우 박정자는 팔순에도 악몽을 자주 꾼다. 그녀는 “무대에 나가야 하는데 대사가 기억이 안 나고 대본을 봐도 글씨가 하나도 안 보이는 꿈”이라며 “사람들은 내가 다 이룬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게 비바람을 맞고 서 있는 셈”이라고 했다.

모드는 좌우명이 ‘매일 새로운 걸 해보자’다. 박정자는 “무공해, 무소유에다 ‘꽃이 다 다른 것처럼 우린 모두 특별하다’고 말하는 모드는 내 삶의 롤모델”이라며 “80이 되면 나도 성숙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더라”고 말했다. 윤석화는 “공연을 할 때마다 도망치고 싶었는데 관객을 만나는 순간 ‘이 강을 건너오길 잘했구나’ 생각하곤 했다”며 “모드가 마지막일 뿐, 선생님은 또 다음 작품을 준비 중일 것”이라고 했다.

공연은 5월 1~23일 KT&G 상상마당 대치아트홀. 박정자가 벗어놓는 허물을 목격할 수 있다. 해롤드는 임준혁·오승훈이 나눠 맡는다.

모드를 연기하는 박정자(오른쪽)과 해롤드. /신시컴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