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회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윤여정/연합뉴스

배우 윤여정이 한국 배우 최초로 미국 아카데미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오스카상)은 26일 오전(한국시각) 미국 로스앤젤레스 유니언 스테이션과 할리우드 돌비극장에서 열렸다.

시상자로 나선 브래드 피트에게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받은 윤여정은 “내 이름은 ‘여정 윤’이다. ‘여영’ ‘유정’ 이라고 부르고는 하는데, 모두 용서하겠다”며 좌중을 웃겼다. 그는 “TV프로그램 보듯 아카데미 중게로 봤는데, 이자리에 왔다니 믿을 수 없다. 투표해준 분들께 감사하다”고 했다. 이어 “미나리 원더풀”을 외치며 “패밀리에 감사하다”고 했다. “정이삭 감독 없이는 이 자리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캡틴이자 감독이었다. 무한한 감사 드린다.”

그는 또 “나는 경쟁은 믿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어릴 때부터 많이 보고 훌륭한 연기를 봤던 글렌 클로즈를 이길 수 있겠는가. 각자 다른 캐릭터를 연기한 각자가 승자다. 경쟁이라 할 수 없고, 운이 좋았던 것 같고, 한국 배우에게 호의 표해준 미국인들 덕분이다.”

윤여정은 특히 자신이 출연한 첫 영화의 감독 김기영에게 감사를 돌렸다. 그는 “김기영은 천재 감독이었고 살아계셨다면 행복해하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여정은 이날 시상식 시작 2시간 전쯤 로스앤젤레스(LA)의 기차역 유니언 스테이션에 도착했다. 오스카 시상식은 2002년 이래 할리우드 돌비극장에서 열렸지만, 올해는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인해 메인 무대가 유니언 스테이션으로 바뀌었다. 윤여정은 레드카펫 인터뷰에서 “한국 배우로서 처음으로 오스카 연기상 후보에 올랐고, 한국인이자 아시아 여성으로서 우리에게 이것은 매우 역사적인 순간”이라며 “나에게는 정말 신나면서도 무척 이상한 일”이라고 했다. ‘미나리’의 한국 할머니 ‘순자’ 역할과 실제 삶이 얼마나 비슷하냐는 질문에 “사실 저는 (영화에서와 달리) 손자와 살고 있지 않다. 이게 영화와 다른 점”이라고 웃었다.

배우는 시작부터 전형적이지 않았다. 대학 신입생 때 방송국에서 선물을 전달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다 “배우를 해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1966년 TBC 탤런트 공채 시험을 통과했고 첫 배역은 8·15 특집극에서 ‘엇나가는’ 재일교포 아이였다. 1969년 MBC 드라마 ‘장희빈’에서 장희빈을 악녀로 연기하자 대중이 알아봤다. 거리에서 “나쁜 Χ”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윤여정은 “연기에 대한 칭찬보다는 돈을 꽤 많이 줘 ‘어머, 이거 해야지’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영화 '미나리'의 배우 윤여정이 한국 배우 최초로 제 93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영화 데뷔는 1971년 김기영 감독의 ‘화녀’였다. “어떤 아저씨가 만나자고 해서 갔는데 그분도 당황했을 거예요. 자기는 김기영인데 제가 전혀 모르니깐(웃음). 당시 들어온 시나리오들은 사랑하다 죽거나 삼각관계 같은 뻔한 이야기들이었는데 ‘화녀’는 달라서 끌렸지요.” 윤여정은 “김기영 감독은 대단한 리얼리티를 끌어내려 했고, 당하는 나는 스물서너 살 때라서 괴로웠다”며 했다. “최근 저와 영화를 하는 감독들은 김기영 덕을 본 수혜자들이에요. 벗으라면 벗고 입으라면 입고 그러잖아요(웃음).”

가수 조영남과 결혼 후 이혼했고 13년 만에 배우로 돌아왔다. 몇 년 전 tvN 예능 ‘꽃보다 누나’에서 윤여정은 “예순을 넘어도 인생 몰라. 나도 67세가 처음이야”라며 웃었다. 요즘 ‘윤스테이’에서도 쿨하다. 농담을 많이 하는, 할머니 같지 않은 할머니다. ‘미나리’는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하루하루 뿌리 내리며 살아가는 한인 가족 이야기다. 윤여정은 “최고의 연기는 돈이 필요할 때 나온다”는 말로 관객들에 웃음을 줬다.

미나리

드라마 ‘파친코’(원작 이민진) 촬영 후 캐나다에서 귀국한 윤여정은 자가 격리 중 후보 지명 소식을 듣고 혼자 술을 마셨다고 했다. 지난달 발표한 소감에서 그는 “응원이 감사하면서도 부담스러웠다. 올림픽 선수들의 심적 괴로움을 느꼈다”고 말을 시작했다. “이런 나이에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을 못했습니다. 후보만으로도 영광이고 최선을 다했기에 상을 탄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제 친구 이인아 PD에게 감사합니다. 어제 소식을 같이 들었는데 제 이름 알파벳이 Y 다 보니 끝에 호명되어 이 친구도 많이 떨고 발표 순간엔 저 대신 울더라고요. 지나온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되네요.”

‘미나리’는 미국 영화지만 열악한 환경에서 찍었다. 윤여정은 “대사 다듬는 것부터 밥짓는 것까지 현장에 찾아온 지인들이 그대로 눌러앉아 도움을 줬다”고 했다. “그렇게 엔딩 크레딧에 올라가지 않을, 기꺼이 비료가 되어준 사람들이 모여 만든 영화예요. 아마 한국인이라는 유대감 덕분에 가능했던 일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