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염혜란은 영화 ‘빛과 철’에서 교통사고로 의식불명인 남편을 간호하면서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영남’ 역을 맡았다. /영화사 찬란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단정 짓지 말아요.”

두 여인이 뒤엉켜 싸우고 있다. 2년 전 일어난 차량 충돌 사고로 희주(김시은)는 남편을 잃었다. 영남(염혜란)의 남편도 2년째 의식불명 상태다. 사고 조사서 속의 가해와 피해가 진실이라고 철석같이 믿었지만, 뒤늦게 새로운 정황들이 나오면서 그 믿음에 금이 갔다. 급기야 이들은 서로를 의심하고 쌓였던 분노가 폭발한다. 멱살을 잡힌 채 누워 있던 희주의 얼굴에선 눈물방울이 뚝뚝 흘러 내린다.

최근 개봉한 ‘빛과 철’(감독 배종대)은 교통사고 이후 가족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정신적 고통을 화두로 삼은 독립영화다. 나홍진 감독의 ‘곡성’(2016)에서 연출부 생활을 했던 배종대 감독의 장편 데뷔작.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다. 각본과 연출 모두 배 감독이 맡았다.

영화는 교통사고의 진실을 파헤치는 미스터리의 외피(外皮)를 두르고 있지만, 장르적 공식에서 서서히 이탈한다. 희주가 재취업한 공장에서 영남이 식당 조리사로 일한다는 설정에서는 언뜻 노동 문제를 다룬 사회극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 역시 영화의 핵심은 아니다. 미스터리와 사회극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던 영화는 결국 후반부에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 걸까.

관련자들의 엇갈린 증언에 따라서 가해와 피해의 관계가 계속 뒤바뀌는 구조는 일본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羅生門)’을 연상시킨다. 한번 붙잡은 화두를 끝까지 놓치지 않는 영화의 거센 악력(握力)은 나홍진의 작품과도 묘하게 닮았다. 지극히 일상적 풍경에서도 가해와 피해, 화해와 용서 같은 진지한 주제를 끌어낸다는 점에서 ‘곡성’의 독립 영화 버전이라고 불러도 좋을 듯하다.

영화는 ‘배우 염혜란의 재발견’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적지 않다. ‘동백꽃 필 무렵’의 도도하고 자존심 강한 변호사부터 ‘경이로운 소문’의 넉살 좋은 국숫집 주방장까지 안방 드라마를 통해서도 친숙한 배우. 이번 영화에서도 초반 내내 대사와 감정, 표정까지 흐트러지는 구석 없이 절제하면서 든든하게 무게 중심을 잡는다. 감정의 응축과 폭발은 영화의 긴장감을 지속시키는 동력이기도 하다. 그동안 이 배우는 극중 누군가의 아내나 엄마로 기억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영화를 통해서 극 전체를 끌고 갈 능력을 갖춘 주연으로서 존재감을 확실하게 드러낸다. 앞으로도 그의 이름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작품이 늘어날 것 같다.

대중성만 놓고 보면 분명 아쉬움도 있다. 모름지기 영화는 속 시원하고 명쾌한 결말을 보여줘야 한다고 믿는다면, 이 작품은 기대에 어긋날 수 있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로 최악의 위기를 맞은 한국 영화계에서 이처럼 뚝심 있는 독립 영화들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 희망의 조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