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여러 얼굴로 살아간다. 이름도 직업도, 때로는 말투와 표정까지 바꾼 채 타인의 삶 속으로 스며든다.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언더커버(위장)’ 신분으로 살아간다는 설정이 최근 많아졌다. 주인공들로선 한 편의 드라마에서 두세 인물 연기를 하는 것인데, 예능에서 출발한 ‘부캐(부캐릭터)’ 요소가 줬던 재미를 드라마가 받아들인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지난 13일 방송을 시작한 SBS 드라마 ‘신이랑 법률사무소’는 귀신을 보는 변호사 신이랑(유연석)이 억울한 죽음을 풀기 위해 사건에 뛰어드는 이야기다. 단순한 법정물을 넘어 조직원이나 연예기획사 관계자 등으로 신분을 바꿔 사건 내부로 잠입하는 ‘언더커버 플레이’가 핵심. 여기에 변호사가 귀신에 빙의된다는 설정까지 더해졌다. 극 중 유연석은 빙의가 시작되면 평소 온화한 캐릭터와 180도 다른 모습을 보인다. 지난 14일 방송된 2화에서 능청스러운 사투리와 거친 행동으로 조폭 출신 귀신을 연기했고, 지난 20일 방송된 3화에서는 그룹 아이브의 ‘러브 다이브’가 흐르자 걸그룹 연습생에 빙의해 화려한 춤과 표정 연기, ‘엔딩 포즈’까지 보여줬다. 6.3%(닐슨 코리아, 전국 기준) 시청률로 출발했던 방송은 6회 만에 전국 10%까지 치솟으며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 8일 종영한 tvN 드라마 ‘언더커버 미쓰 홍’은 주인공 박신혜가 증권감독원의 ‘엘리트 감독관’(홍금보)과 ‘말단 직원’(홍장미)이라는 상반된 정체성을 오가며 극을 이끈다. 30대 엘리트 감독관이 증권회사의 20대 고졸 신입 사원으로 위장 취업해 비자금 사건을 추적한다는 설정. 신분이 들통날 뻔한 순간을 아슬아슬하게 넘기며 긴장감을 높였다. 초반 3%대에서 시작한 드라마는 최종회 12.4%로 인기를 끌었다.
언더커버 장르의 원형으로는 ‘모범택시(SBS)’ 시리즈가 꼽힌다. 이제훈이 연기한 주인공 택시 기사 김도기는 매회 다른 인물로 변신해 복수를 대행한다. IT 업체 개발자, 교사, 매니저 등 여러 신분을 연기하는 이른바 ‘에피소드형 부캐 구조’는 이후 드라마들에서 마치 템플릿처럼 확산됐다. 지난해 9월 방영된 TV조선 ‘컨피던스맨KR’ 역시 윤이랑(박민영), 제임스(박희순), 명구호(주종혁)가 상황에 따라 승무원, 멕시코계 한국인 3세, 신인 감독 등으로 변신하며 이야기를 끌어갔다.
한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여러 캐릭터를 연기하는 구조는 예능에선 유행 코드 중 하나였다. 코미디 예능에서 이수지, 나선욱처럼 부캐를 앞세운 콘텐츠가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한 사람이 여러 인물로 변신하는 것 자체가 ‘재미’를 주면서 이런 흐름이 드라마까지 연결됐다는 것. 하재근 대중문화 평론가는 “예능에서 출발한 부캐 열풍이 시청자들에게 ‘변신 자체의 재미’를 학습시키면서, 그 문법이 드라마로 자연스럽게 확장된 흐름”이라며 “한 사람이 여러 캐릭터를 오가는 구조가 빠르고 강한 자극을 주는 동시에, 매회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장치로 작동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