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29일 미국 NBC 지미 팰런쇼 시청자들은 화면을 보며 환호했다. 한복을 재해석한 무대의상을 입은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경복궁 근정전에서 ‘아이돌(idol)’이라는 곡을 부르고 있었다.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왕의 즉위식과 외국 사신 접견이 이뤄지던 곳에서 K팝 공연이 펼쳐진 순간이었다.

사흘 뒤인 10월 2일에는 경회루였다. 조선 왕실의 연회 공간에서 BTS는 ‘소우주’를 불렀다. 근정전이 권력의 공간이라면 경회루는 풍류의 공간이다. 그곳에서 “이 밤의 표정이 이토록 또 아름다운 건 저 어둠도 달빛도 아닌 우리 때문일 거야”라고 노래했다. 조선 건축미의 절정으로 꼽히는 경회루가 글로벌 팝의 예술적 무대로 승화된 순간이다.

근정전 앞마당에서 울려 퍼진 ‘아이돌’은 왕조의 시간을 깨우듯 힘차고, 경회루 위 ‘소우주’는 물결처럼 잔잔하다. 오래된 건축과 현대의 리듬이 한 화면에 겹치며, 시간의 층위가 겹겹이 쌓인다. 전통은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움직이는 감각임을 보여준다. 수백 년의 시간을 품은 궁궐은 그 순간, 현재형 무대로 다시 태어난다.

BTS 컴백 라이브 공연이 펼쳐질 광화문 광장 무대 뒤로 경복궁과 북악산이 보인다./넷플릭스 제공

◇왕의 뜰에서 ‘아이돌(IDOL)’을 부르다

BTS의 선택하는 공간에는 서사가 담긴다. 경복궁부터 유엔본부까지, 전 세계에서 가장 상징적인 장소들을 무대로 삼아 ‘K팝의 공간 철학’을 새로 써왔다.

2021년 9월에는 600년 된 서울의 성문, 대한민국 국보 제1호 숭례문이 무대가 됐다. 국제 빈곤 퇴치 단체 ‘글로벌 시티즌’이 6개 대륙에서 동시에 중계한 공연에서 BTS는 첫 주자로 나서 야간 조명으로 화려하게 빛나는 숭례문을 배경으로 ‘퍼미션 투 댄스(Permission to Dance)’를 불렀다. 2008년 방화로 누각이 무너져 내렸고, 5년에 걸친 복원 끝에 2013년 다시 세상 앞에 모습을 드러낸 그 문 앞이었다. 이는 역사적 상처를 딛고 이어진 회복력을 상징한다. 동시에 ‘전통 기반의 K팝’이라는 메시지를 시각화한 고도의 브랜딩이었다. 무대 세트는 숭례문의 실루엣을 해치지 않는 원형 구조로 설계됐다. 바닥과 조명 곳곳에 한국 전통 문양이 새겨졌다. 야간 조명이 숭례문을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2020년 10월에는 ‘2020 빌보드 뮤직 어워드’ 무대를 위해 인천국제공항 터미널을 선택했다. 코로나로 세상이 멈춰 텅 비어 있던 곳이다. 단절된 세계가 다시 연결되기를 바랐기 때문. 텅 빈 탑승구, 아무도 없는 면세구역, 멈춰 선 수하물 컨베이어. 그 사이에서 ‘다이너마이트(Dynamite)’의 첫 음이 울렸을 때, 그것은 단순한 공연이 아니었다. 멈춰 선 세계에서도 음악은 흐르고, 사람들은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조용한 희망을 전했다. 팬데믹이 빼앗아 간 그 모든 ‘이동’과 ‘만남’에 대한 애도이자, 언젠가 다시 연결될 것이라는 약속이었다. 세계를 연결하는 허브이자 한국의 관문인 공항을 무대로 삼아 K컬처가 단순한 콘텐츠를 넘어 세계를 잇는 플랫폼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치였다.

같은 해 6월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이 무대가 됐다. 유튜브가 기획한 온라인 가상 졸업식 ‘디어 클래스 오브 2020’이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구글 최고경영자(CEO) 순다르 피차이와 함께 특별 연설자로 초청된 BTS는 한국 아티스트로는 유일한 참여자였다. 그들은 인류 문명의 축적을 상징하는 공간에서 ‘작은 것들을 위한 시’ 등을 불렀다. 젊은 세대와 문화유산의 연결을 도모하는 의미였다. 한 언론은 “걸어 다니는 국보가 왔다”고 했다.

◇도시·유산·아티스트의 결합

BTS의 공간 미학은 글로벌로 확장됐다. 2020년 정규 4집 타이틀곡 ‘온(ON)’은 미국 도시 건축의 상징 ‘뉴욕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에서 최초 공개됐다. 뉴욕의 심장부로 유동 인구가 많기로 유명한 이곳을 통째로 비우고 신곡을 공개한 것은 ‘우리가 주인공’이라는 선언이었다.

미국 뉴욕 소재 유엔 본부 신탁통치 회의장 연단에서 K팝 그룹 방탄소년단의 리더 RM(김남준)이 멤버들을 대표해 연설하고 있다. RM 뒤에 방탄소년단 멤버들이 서 있다. 유엔 총회 행사장에서 한국 가수가 연설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유엔아동기금(UNICEF) 주최로 열린 이날 행사에는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앞에서 둘째 줄, 오른쪽에서 셋째)도 참석해 격려의 메시지를 전했다.

2021년 유엔 총회 ‘지속가능발전목표(SDG) 모멘트’ 개회 세션에서는 연설을 마치고 잔디 광장으로 이동하며 공연했다. 국제 외교의 심장부를 유쾌한 축제의 장으로 변모시키며 ‘공간의 확장성’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이는 BTS가 ‘글로벌 문화 외교 아이콘’으로 격상되었음을 보여줬다. BTS는 공간의 역사와 상징성을 자신들의 음악적 메시지와 결합해 ‘문화적 각인’을 남겨왔다.

도시·유산·아티스트가 결합되는 공연은 세계 대중문화사에서 중요한 장면으로 기록되곤 했다. 폴 매카트니는 2003년 로마 콜로세움에서 약 50만명 규모의 무료 공연을 열었다. 로마 황제가 시민들에게 오락을 제공하던 고대 로마 시대 유적지와 영국의 록 레전드가 만난 것이다. 이 공연은 “폴 매카트니의 음악을 2000년 된 돌벽에 새긴 문화사적 사건”으로 언급된다.

지난 3월 콜롬비아 팝 가수 샤키라는 멕시코시티 중앙광장 소칼로에서 무료 공연을 개최했다. 소칼로는 아즈텍 유적이 있는 역사적인 장소다. 멕시코 상공회의소는 “이날 공연에는 약 40만명이 운집해 약 4억 300만 페소(약 340억원)의 경제적 효과를 가져왔다”고 밝혔다.

시대마다 국가의 이미지를 대변하던 ‘문화 대사’가 있었다. 비틀즈는 전쟁 후 침체된 영국의 이미지를 젊음과 창의성의 상징 ‘영국 침공(British Invasion)’으로 전환했다. 마이클 잭슨은 다양성과 자유의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를 대변했다. BTS는 전통과 현대 이미지를 동시에 노출하며 한국을 ‘문화 강국’으로 인식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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