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악, 짝! 직원 뺨을 살벌하게 올려붙이던 드라마 ‘모범택시’의 악덕 회장 ‘박양진’. 이 배역을 사실적으로 소화해 시청자 혈압을 올렸던 배우 백현진(54)이 봄처럼 말랑한 색깔로 돌아왔다. 한결 힘을 덜어낸 손으로 맑디맑은 물감을 한지 위에 올리는 화가로서다.
그는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드라마 ‘무빙’, 예능 ‘직장인들 시즌2’ 등 많은 작품에 등장하며 배우로서 전성기를 보내고 있다. 특히 ‘직장인들’에선 묘하게 분위기 못 맞추는 부장 연기로 기존에 없던 새로운 코믹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알고 보면 그의 직업은 화가와 가수까지 총 세 개다. 순서로 치면 배우보다 가수와 화가의 길이 먼저다. 홍대 미대를 중퇴했지만, 1996년 첫 단체전 출품 이래 화가로서 국내외에서 꾸준히 전시를 열었다. 2017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후원 작가로 선정된 바 있다. 1997년 인디 뮤지션(현 ‘어어부 프로젝트’)으로 데뷔 후 그룹 및 솔로 활동도 이어오고 있다.
백현진이 다음 달 21일까지 서울 삼청동 PKM 갤러리에서 개인전 ‘Seoul Syntax’를 열고 있다. ‘박양진’도 ‘백 부장’도 아닌 화가의 모습으로 전시장에서 만난 백현진은 “제 연기가 소셜미디어에 쇼츠로 많이 올라오니 배우로 정말 바빠 보이나 보다. 언제 그림과 음악 작업까지 하느냐는 말을 많이 듣는다”며 웃었다. 그는 “여전히 화가와 음악가로 사는 시간이 더 많다”며 “배우로 일하는 시간은 1년 중 40일에서 60일 정도”라고 설명했다.
유년 시절 서재를 가득 채웠던 아버지의 노란 내셔널지오그래픽 잡지와 미대생 누나, 문학책과 허영만의 만화가 그를 자연스레 예술가의 길로 이끌었다. “중3 때 집이 어려워지고 막상 진학한 미대는 제게 잘 맞지 않았어요. 장영규(어어부 프로젝트 멤버)와 밴드를 만들어 1995년부터 홍대 앞에서 공연을 시작했죠. 그림도 혼자 그렸고요.” 그래픽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기도 했다. “지금 보면 청년 시절을 계속 ‘번아웃’ 상태에서 통과했던 것 같다”고 그는 돌아봤다.
2000년대 초반부터 독립영화에 출연해왔던 배우 경력이 ‘모범택시’에서 빛을 봤다. 사실적 연기 뒤에 고통도 있었다. 그는 “‘모범택시’ 때 계속 사람을 때리고 지독한 말을 하는 연기를 하다 보니 몸이 아프더라”며 “붓을 들었더니 화가로 전환되더라. 그래서 잘 버틸 수 있었다”고 했다. 지금은 반대로 그림에 영향을 줄까 봐 “화가 많은 사람이나 우울한 사람 역할을 한 뒤엔 붓을 바로 들지 않는다”고 했다.
전형적이지 않은 그의 인생 보법처럼, 전시장엔 수수께끼 같지만 날아갈 듯 자유로움이 밴 그림들이 눈길을 끈다. 기호와 선, 색면으로 내면의 생각들을 풀어냈다. “세 개의 업은 제 뱃심이 되어 줬어요. 배우로 번 돈이 있었기에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림 그릴 수 있었고, 때로는 음악이 수입원이 됐죠. 그런 운이 따라줬네요. 그중에서도 저를 찾는 이가 없을 때, 끝까지 하고 있는 건 그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