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광안대교 위를 주인공이 내달린다. 쏟아지는 총알을 피해 하늘로 뛰어오르자 폭발하는 다리…. 국내 토종 OTT 티빙의 인기 애니메이션 ‘테러맨’의 시작 장면이다. 블록버스터급 액션물 못지않은 긴박감과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한다.
‘주술회전’ ‘귀멸의 칼날’ 등 글로벌 OTT에서 성인용 애니메이션 시청 열기가 뜨겁다. 이런 가운데 티빙이 지난달 29일 국산 8부작 ‘테러맨’(15세 관람가)을 공개했다. 국내에서 아동용 애니메이션은 많지만, 성인 시청자(15세 이상)에 맞춘 애니 시리즈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던 만큼 신선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9일 티빙 본사에서 만난 ‘테러맨’의 엄상용(58·DR무비) 총감독은 “미·일 애니의 위탁생산(OEM)에 특화된 한국 애니 산업 형태는 3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면서 “언젠가 한국 애니메이터도 자기 정체성을 말하는 때가 와야 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테러맨’은 “그 초석이 되길 바라며 만든 작품”이라는 것.
엄 감독은 30대 때부터 북미 유명 스튜디오들과 협업해 왔다. 재작년 열린 제75회 에미상 시상식에서 최우수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상을 받은 미국 ‘심슨 가족’의 할로윈 특집 회차 ‘공포의 트리하우스33’ 중 두 번째 에피소드를 그가 만들었다. 넷플릭스 일본 애니 ‘플루토’(2023) 4회차도 그의 솜씨다.
그는 “(한국에서 만든) ‘테러맨’이 제 30여 년 커리어의 ‘정점’”이라고 강조했다. 해외 제작사의 가이드 위에 펼치는 OEM이 아닌 모든 과정이 ‘국산’이라는 점에 의미를 두는 것이다. “OEM을 하며 한국 애니메이터들이 찬사를 많이 들어요. 하지만 그런 것들이 본인과 국내 산업에 무엇으로 남는지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티빙을 통해 세상에 나온 ‘테러맨’은 CJ ENM 내 스튜디오 바주카와 엄 감독이 소속된 국내 제작사 DR무비가 협업해 3년에 걸쳐 완성됐다. 2016년부터 연재됐던 동명 한국 웹툰이 원작. 건물 붕괴 같은 불행을 미리 보는 고등학생 주인공 ‘정우’가 영웅으로 성장해 가는 액션물이다. 서울 합정역 등 한국적인 장소들이 등장하고 액션 외에 극적 재미와 서사를 잘 살려내 두 번째 시즌 제작을 바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성인용 애니메이션은 현재 전 세계적으로 커지고 있는 새로운 시장이다. 넷플릭스 구독자 중 애니 시청자가 5년 새 3배로 늘었다. 다만 넷플릭스의 애니메이션 투자는 일본과 미국으로 집중되는 추세여서 국내 업계가 이 시장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엄 감독은 “우리 애니메이션 제작이 활성화돼 해외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의 실력자들이 국내로 돌아온다면 좋을 것”이라고 했다.
특히 그는 한국적 소재를 활용한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성공을 보며 “한국인으로서 약이 올랐다”고 했다. 그는 “한국 문화가 어마어마한 부흥기를 맞은 지금 기회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한국 애니메이션 연출자들이 국내 작품에 과감히 뛰어들었으면 한다”고 했다. 그는 진심으로 애니메이션의 ‘생존’을 기원한다고 했다. “드라마나 영화와는 다른, 사람의 손이 만들어내는 울림과 감동이 있거든요. 애니메이션을 통해 우리 손으로 우리의 정서를 제대로 담아내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