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선을 넘으세요. 나중에 뒷감당 어떻게 하시려고.”
고함도 폭력도 없다. 그러나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 던지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오히려 더 날 선 압박이 된다. 디즈니+ 드라마 ‘메이드 인 코리아’에서 중앙정보부 과장 표학수(노재원 분)가 검찰의 추궁을 받아치는 장면은 섬뜩하다. 최근 ‘악역’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드러내 놓고 위협하기보다 일상 대화처럼 흘려보내는 말투가 더 불편한 긴장을 조성한다.
현빈·정우성 주연인 ‘메이드 인 코리아’(6부작)는 1970년대를 배경으로 부와 권력을 향한 욕망이 어떻게 국가 권력과 결탁하는지를 그린 범죄 스릴러다. 중앙정보부 과장 백기태(현빈)는 마약 사업까지 넘보며 부를 축적하고, 검사 장건영(정우성)은 ‘미친개’라 불릴 만큼 집요하게 그를 추적한다. 디즈니+ 2025년 한국 오리지널 중 아시아·태평양 지역 최다 시청 기록을 세웠고, 시즌2가 하반기 공개를 목표로 제작 중이다.
현빈과 정우성이라는 두 주연 못지않게 강한 인상을 남긴 인물은 빌런(악역) 표학수를 맡은 배우 노재원이다. 그에 대해선 “연기에 과장이 없어 더 무섭다”는 분석이 나온다. 시청자들은 “우리 주변 어딘가에 있을 법한 생활형 빌런”이라고 느낀다. ‘오징어 게임’ 시즌 2·3에서 ‘남규’ 역을 맡아 생존을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살인을 하던 그 배우다.
최근 드라마에서 이른바 ‘극사실주의 빌런’으로 불리는 조연들이 눈길을 끌고 있다. 괴물이나 악당이 아닌데도, 누구나 사용하는 일상의 언어와 태도로 악역을 만들어내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회사나 학교 등 현실의 조직과 권력 구조에서 실제로 마주치는 얼굴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배우 백현진은 SBS ‘모범택시 시즌1(2021)’에서 국내 최대 웹하드 업체 ‘유데이터’의 회장 박양진을 연기했다. 직원 감금과 폭행, 투신 자살 위장, 불법 영상 유통까지 서슴지 않는 파렴치한 사업주. 이 인물은 자신의 불법과 폭력적 행위를 정당화하는 언어로 시청자들에게 충격을 안겨줬다. 예를 들어 그는 극 중에서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있고, 철저하게 성적순” “내가 니들의 줄과 빽이 되어준다” 같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다. 돈과 성과를 앞세워 인간을 줄 세우고, 그 논리를 신념처럼 강요하는 태도, 섬뜩하지 않은가.
회사는 빌런들로 넘치는 공간이다. 배우 이현균은 JTBC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2025)’에서 25년 차 선배 김낙수(류승룡)의 퇴직 절차를 담당하는 인사팀장 최재혁을 맡았다. “선배님, 거기 제출하기 버튼 누르면 이제 진짜 끝이야. 완전 굿바이”라는 대사처럼, 존댓말과 반말의 경계에 걸친 말투로 상대를 압박한다. 김낙수를 서서히 몰아붙이는 그의 태도에 시청자들이 ‘직장 생활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호소했을 정도. 그만큼 현실에 밀착된 얼굴이었다. 우리 주변에서 얄밉거나 분노를 유발하는, 묘하게 현실적인 연기를 했다. 그가 정리해고 리스트라는 칼자루를 휘두르지만, 동시에 조직에서 주어진 역할을 수행할 뿐이라는 설정은 모두를 불편하게 했다.
폭력을 가장 차갑게 보여준 인물은 배우 박병은이다. 그는 디즈니+ 드라마 ‘무빙(2023)’에서 목적 달성을 위해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는 국가정보원 제5차장 마상구를 연기했다. 중국 옌볜의 호텔 파티에서 이중간첩을 가려내겠다며 가짜 작전을 꾸미고, 현지 정보원과 내통자들을 무표정으로 제거하는 장면, 그 과정에서 애국가를 흥얼거리는 모습은 섬뜩함을 남겼다.
공희정 드라마 평론가는 “최근 드라마의 빌런은 괴물이 아니라 옆자리에 앉아 있을 법한 사람”이라며 “현실의 언어로 자행되는 악한 행위는 분노를 일으키면서도 우리 사회 구조와 맞닿아 있다는 강한 암시를 준다”고 했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