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하고 초췌한 앳된 얼굴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붉어진 눈시울과 갈라진 목소리까지, 숙부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어린 왕의 분노와 두려움, 슬픔, 죄책감, 처절함이 관객석으로 그대로 전해진다. 한국 영화 최초로 단종의 숨겨진 이야기를 다룬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서 배우 박지훈이 17세에 생을 마감한 단종 이홍위를 연기했다. “오늘 밤 주인공은 나야 나” “내 마음속에 저장”을 외치며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던 소년이 처연한 얼굴의 단종으로 변신해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박지훈은 27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나 “첫 영화를 개봉하게 돼 영광”이라고 소감을 전했다. 이번 작품은 박지훈의 첫 스크린 데뷔작이다. 아역배우 출신인 데다 이미 드라마 ‘약한영웅’ 시리즈 등으로 연기력을 인정받은 그이지만, 이 영화는 도전이었다고 한다.
박지훈은 “역할을 제안받았을 때 사실 되게 마음이 무거웠다. 단종을 연기한다는 거 자체가 한편으로는 너무 죄송하기도 했다”며 “스스로 연기에 대한 의심이 많기 때문에, 그 감정을 제가 헤아릴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미팅이 네 번 이어질 때까지도 박지훈은 선뜻 역할을 받아들 수 없었단다. 그런 박지훈의 결심을 굳힌 건 “단종은 너여야만 해”라는 장항준 감독의 한마디다. 그는 “그 말을 듣고 돌아가는데 영화를 한 편 본 것처럼 ‘어쩌면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감독님 믿고 도전해봐도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며 “그래서 그 부담감을 이겨내고 한다고 했다”고 회상했다.
이후 박지훈은 체중을 15㎏ 감량하며 역할에 스며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피폐해진 모습보다도 더 나아가 피골이 상접했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냥 말랐다기보단 너무 안 됐다는 말을 듣는, 입술도 버석하게 말라 있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 보이는 애처럼 보이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래서 그걸 표현하기 위해 사과 한쪽만 먹으면서 버텼다. 촬영 중에도 목소리에 버석함이 있으면 좋겠어서 물도 최대한 안 먹었다”고 했다.
박지훈이 그려낸 단종의 모습은 극의 후반부로 가면서 ‘범의 눈’을 갖추며 점점 변화한다. 이는 기존 단종의 나약한 모습과는 다른 이미지를 그려내고 싶었다는 장항준 감독의 연출 의도다. 박지훈은 “대본을 보면서 나약하지만은 않은 단종을 그리고 싶어 하셨단 걸 많이 느꼈다”고 했다.
그는 “대본을 보면서 슬픔의 감정을 디테일하게 잡아가는 데 신경 썼다”며 “‘약한 영웅’에서는 혼자 있고 싶어 하는 인물의 공허함을 표현했다면, 이 영화에서는 더 단절되고, 무기력한, 낭떠러지 아래에 있는 듯한 슬픔을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박지훈은 완성된 영화를 보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마지막 신 찍을 때가 기억에 남는다. 중요한 신이라 현장이 정말 고요했다”며 “문이 열리고 유해진 선배님이 들어오시는데, 오랜만에 보는 아빠의 모습 같았다. 가슴이 아플 정도로 눈물을 많이 흘렸다. 제가 느껴본 최고의 순간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당시를 떠올리면서 감정이 북받치는 듯 눈물을 글썽였다.
그는 “유해진 선배님과 촬영하면서 매 순간 에너지에 놀랐다. 선배님이 주신 에너지를 받아서 다시 잘 드려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후에 연기는 기브앤테이크라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그걸 잘 지켜왔던 것 같다”고 했다. 이어 “선배님과 호흡 맞추면서 ‘연기라는 걸 오랫동안 해서 다행이다’라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고 덧붙였다.
또 악역 한명회 역을 맡은 유지태에 대해서는 “선배님이 주시는 에너지가 무서울 정도로 강렬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첫 촬영 비하인드를 전했다. 그는 “선배님이 들어오시는데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도 위압감, 아우라가 느껴져서 눈을 못 마주치겠더라”라며 “감독님께 말씀드렸더니 ‘너 편한 대로, 마음 가는 대로 해’라고 해주셨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진지하게 임한 박지훈의 모습은 감독과 선배 배우들의 마음도 사로잡았다. 영화에서 함께 호흡을 맞춘 유해진과 전미도, 유지태 등은 입을 모아 박지훈의 연기력과 태도를 칭찬했다. 이에 대해 박지훈은 “제가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고, 진중하고 조금 생각이 많은 편인 것 같다. 그게 선배님과 감독님 눈에는 예뻐 보이셨던 것 같다”며 “제가 딱히 ‘이렇게 잘 보여야지’ ‘오늘은 이렇게 다가가야지’라고 생각하고 접근하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그냥 정말 사람처럼 다가오는 모습을 예쁘게 봐주셨던 것 같다”고 했다.
정식 개봉 전이지만 이미 시사회를 본 관객들 사이에서는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박지훈은 “선배님과 훌륭하신 감독님이랑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하고, 감사하다”고 소감을 전했다. 이어 “검색을 많이 안 하는 편이라 감독님이 좋은 말들을 보내주신다. 그걸 보면서 하나의 좋은 추억이 생겼구나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왕과 사는 남자’는 1457년 청령포, 마을의 부흥을 위해 유배지를 자처한 촌장과 왕위에서 쫓겨나 유배된 어린 선왕의 이야기를 그린다. 박지훈이 단종 이홍위를, 유해진이 단종의 유배 생활을 감시하는 엄흥도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이 밖에도 유지태, 김민, 이준혁, 박지환 등이 출연했다. 다음 달 4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